지난 여름에도 여지없이 태풍이 불었습니다. 특히 올해에는 가을까지도 태풍이 올라와서 농가에 큰 손해를 입었습니다. 태풍이 몰고 오는 많은 비도 문제지만, 함께 불어오는 거센 바람 역시 만만치가 않습니다. 지난가을에 올라온 태풍 링링과 타파 때문에 제가 있는 성지에서도 꽤 피해가 있었습니다. 많은 나무가 잘려나가고 야외 벽면에 붙어 있던 ‘최후의 만찬’ 부조가 바람에 떨어져 나가서 누가 다칠 뻔하기도 했습니다.
뉴스를 보면 간판이 떨어지고, 담과 펜스가 넘어지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제주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돌담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난가을 태풍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제주도이지만, 이 돌담이 넘어진 곳은 하나도 없었답니다. 그냥 규칙적으로 쌓은 돌담 같은데 왜 그 강한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수가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돌 사이에 틈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돌 사이를 일부러 메우지 않았는데 이 틈새로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에 세찬 바람에도 돌담이 통째로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완벽한 사람보다는 부족한 듯 빈틈이 있는 사람에게 인간미와 매력을 더 느끼게 됩니다.
이 점을 떠올리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왜 완벽한 모습의 하느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않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향해 따끔한 채찍을 휘두르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까요?
정치 권력을 장악해서 백성을 억누르는 이 세상의 임금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나약한 모습으로 죽음에 이르십니다. 이로써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세상의 눈으로 보면 패배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혁명을 일으키러 왔다가 십자가형을 당한 실패자라고 말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통해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온 누리의 임금이심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인 오늘, 주님을 세상의 눈으로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영적인 눈으로 우리에게 큰 사랑으로 임금이 되신 주님을 바라보고 굳게 믿어야 합니다. 낙원이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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