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회사 분석가를 포함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간혹 자신의 전망이 완전히 빗나가는 상황이 오곤 합니다. 이때 이들의 반응에 따라 일류, 이류, 삼류로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일류는 ‘예측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보다 예측이 빗나갔다고 판명되었을 경우, 재빨리 그 상황을 보고하면서 신뢰를 회복하는 사람입니다.
이류는 서툰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입니다. 자기 때문이 아니라는 이유만을 늘어놓습니다. 신뢰하기 힘들어집니다.
삼류는 틀린 자기 의견을 계속해서 고집하면서, 결과적으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실패했을 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신뢰만큼은 잃지 않게 됩니다. 이 신뢰로 최고의 것을 얻을 수 있음에도, 순간의 위기만 모면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이류, 삼류의 삶을 삽니다.
자신의 실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일류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왜 주님께서 계속해서 겸손하라고 하셨는지를 다시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중 율법 교사 한 명이 예수님께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스승님이라고 부르니까 특별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 바리사이들은 무리의 힘으로 그분을 이기려고 한데 모인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합리적인 논증으로는 그분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난해한 질문을 하나 들고 나타납니다. 즉,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율법의 세부 조항 613개 모두가 빠지지 않고 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사랑에 달려 있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단지 예수님을 이기려는 수단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율법이 이기고 지는 수단이 아닌, 사랑 그 자체를 봐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그들의 숨은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의 틀렸음을 인정하고서 회개의 모습을 보였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일류가 아닌, 이류, 삼류의 모습을 보입니다. 서툰 변명을 늘어놓으면 자신들은 맞고 예수님은 틀렸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겸손의 삶을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가득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