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작가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책을 읽다가 ‘사랑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질문의 답은 ‘미움’이 아닌 ‘무관심’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곧바로 ‘무관심이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그 답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이용한다’입니다.”
출세를 위해, 외로워서, 욕정을 풀기 위해, 돈이 없어서, 먹고 살기 위해서, 남이 얕보니까, 집안일을 위해, 허전하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등의 이유 있는 사랑은 상대를 이용하는 것으로 사랑과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공지영 작가는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성장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려는 의지입니다.”
받으려는 사랑, 이용하려는 사랑, 각종 이유를 붙이는 사랑은 그만해야 합니다. 그보다 주는 사랑, 목적 없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함께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보다 주님의 것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십니다. 사실 일꾼을 뽑으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세상의 기준을 생각하게 됩니다. 능력도 많고 배움의 양이 많은 사람을 그리고 다른 이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성격과 재능을 갖춘 사람을 뽑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조금 다릅니다.
제일 먼저 뽑은 제자들은 배운 것 없는 모두 어부였습니다. 고기를 잡는 것 외에 특별한 기술이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계획의 일꾼으로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삼으십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터무니없는 사람이지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세상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면 이 지상 생활의 그 어떤 것에도 연연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으며, 가족까지도 뒤로 하고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면서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것을 더 누리겠다는 욕심과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가득 받기를 계속해서 청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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