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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바보의나눔 온라인 사진전으로 다시 만나는 김수환 추기경|

  • 홍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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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2-13 오후 12:02:37

(재)바보의나눔 온라인 사진전으로 다시 만나는 김수환 추기경

그립습니다… 이제 우리가 당신의 길 따르겠습니다

   


2009년 2월 16일,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우리에게 사랑을 심어 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그의 선종 11주기를 맞아, 재단법인 바보의나눔(이사장 손희송 주교) 홈페이지에서 진행하는 ‘김수환 추기경 선종 10주년 기념 사진전’(www.babo.or.kr/cardinalkim)을 통해 김 추기경이 생전 보여 준 사랑과 나눔 정신을 되새기고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한다. 이번 사진전은 지난해 2월 (재)바보의나눔이 김 추기경 선종 10주년을 맞아 서울 명동 1898광장에서 열린 사진전을 온라인으로 옮긴 것이다.


◀ 2007년 서울 혜화동 주교관 마당을 산책하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
■ 1관 나는 바보입니다

시대의 ‘거룩한 바보’였던 김수환 추기경.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며 그가 남긴 자화상 ‘바보야’를 떠올린다. 김 추기경이 2007년 동성고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화상 제목에 대해 묻자 그는 “제가 잘났으면 뭘 그렇게 크게 잘났겠어요. 다 같은 인간인데…. 안다고 나대는 것이 바보지”라고 겸손하게 답했다.

1관에서는 평생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가장 소외된 이들을 서슴없이 찾아 나선 인간으로서의 김 추기경 모습을 보여 준다. 전시에서는 생전 그의 이러한 모습을 영상을 통해서도 만나볼 수 있다. 2001년 10월 26일 서울 구치소 미사를 주례하며 사형수들을 면담한 김 추기경은 그들에게 하느님 사랑에 대해 설명한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실 뿐 아니라, 오히려 자기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사람, 용서를 청하는 사람을 더 귀엽게 봐 줘요. 이런 사람을 당신의 아들로, 당신의 딸로 받아 주시고 돌봐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그런 하느님이십니다.”


■ 2관 세상엔 옹기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옹기’는 좋은 것 나쁜 것 심지어 오물까지도 담는 존재다. 김 추기경은 무엇이든 기꺼이 품고 담으며 스스로 옹기 같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전시에서는 화려하고 보기 좋은 것만 담으려고 하는 우리 사회에 옹기 같은 김 추기경이 가장 필요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1922년 5월 대구 남산동에서 가난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성품이 곧고 독실했던 어머니의 바람대로 1951년 9월 15일 대구 주교좌계산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으며 사제가 됐다. 2관에서는 사제품을 받고 어머니 고(故) 서중하(마르티나) 여사와 함께 성당 앞에서 찍은 사진, 1993년 김 추기경이 경북 군위 옛집을 방문했을 당시 사진 등을 볼 수 있다.

또 사 제가 되려는 이들에게 기도를 강조하는 모습도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영상 속 그는 1998년 6월 25일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서 만난 사제서품 예정자들에게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로 출발하길 바란다”며 “무엇보다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다.












왼)2005년 12월 서울 혜화동 주교관에서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 사실이 드러난 뒤 진행한 성탄 특별대담에서 난치병 환자들의 절망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


오)2005년 5월 29일 경기 의왕시 성 라자로 마을에서 성체거동 미사를 봉헌하는 김수환 추기경.


1994년 5월 사랑의 성령 수녀회를 방문해 기도하는 김수환 추기경.

1997년 12월 행당동 재개발지역 철거민 방문 모습.


■ 3관 가난한 자가 되고 싶습니다

김 추기경은 떠났지만, 그가 남긴 감동과 사랑의 온기는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다. 그는 굶주려 있는 피난민들에게 “한 식구로 살자”며 묵주를 건넸고, 성매매 여성들에게 구겨진 바지를 입고 친근하게 다가가는 등 소외된 이들의 ‘친정 아버지’를 자처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1996년 12월 19일 외국인 노동자 쉼터 베다니아의 집 축복식에 참석한 그가 외국인 노동자의 손을 한동안 꽉 잡으며 격려하고 있는 모습은 영상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97년 12월 서울 행당동 재개발지역 철거민을 방문하는 사진, 1988년 6월 부산의 베트남 난민 보호소를 방문한 사진 등에서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낮은 자리에서 만나는 이웃들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통장 잔고 300여 만 원을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게 전달했던 것은 나 역시 낮은 자리에서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2005년 성가정입양원 방문 모습.
■ 4관 인간은 존엄합니다

김 추기경은 한국교회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던 한국사회를 밝혀 온 ‘별’이었다. 특히 1970~80년대 격동기를 지나면서 ‘사람’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인간 존엄’을 실현하기 위해 앞장섰다.

그는 한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이념에 좌우되지 않고 원칙을 지켜 나갔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진보도 보수도 아닌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온 그가 머물던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은 핍박 받는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이자 민주화의 성지였다. 1987년 6월 명동대성당으로 피신한 학생들을 정부 관계자들이 체포하러 오자 “나를 밟고 가라”며 엄준히 꾸짖어 돌려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4관에서는 김 추기경이 1996년 12월 한국 노동운동사의 분수령이 된 노동법 날치기 사건 후, 이듬해인 1997년 1월 12일 명동대성당에서 봉헌한 미사 강론에서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찾을 것을 호소하는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극한적 대치를 지양하고 대화를 통해 함께 고민하고 함께 해결책을 간구해 주기를 간절히 거듭 거듭 호소하고 싶습니다.”

성슬기 기자 chiara@catimes.kr 가톨릭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