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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04-01 조회수 : 52

찬미예수님!

 

늘 감사와 존경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꽃샘추위가 반짝했지만 봄이 왔습니다. 성지도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을 기지개 켜고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습니다. 날이 풀리면서 성지를 찾아주시는 순례자분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고, 4, 5월에 여러 단체 순례팀들이 성지순례를 신청해주고 계십니다. 변함없이 성지를 사랑해주시고 찾아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늘어나는 순례팀 예약 소식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좋은 성지순례를 하실 수 있도록 주어진 소임에 더욱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달에는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되어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대박해, 병인박해에 대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당리 성지에서 현양하고 있는 장주기 요셉 성인을 비롯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대부분 병인박해 때 순교하셨기 때문에 병인박해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병인박해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병인박해는 1866(고종3년 병인년) 초에 시작되어 1873년 흥선 대원군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를 박해 기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병인박해의 배경적 원인으로는 유교 외의 사상을 이단으로 보고 물리치려는 전통과 서양 천주교를 사악한 것으로 규정하여 이를 배척하려는 의식, 천주교 교리와 유교 사회 윤리와의 갈등, 서양 세력의 위협이 있을 때마다 천주교 세력이 그 앞잡이로 위정자들에게 이해된 상황이 있습니다. 이 서양 세력의 위협에 대해 특히 186010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하자 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고 이에 조선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프랑스 함대나 다른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한 위기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북경 함락 이후에 체결된 북경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하고 남하 정책을 펴 오던 러시아가 18642() 함경도의 경흥부사에게 서한으로 통상을 요구하는 상황을 만들면서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고종의 친부로 정권을 잡고 있던 흥선 대원군은 1860년에 북경이 서양 세력에 함락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대원군은 조선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과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그들을 통해 러시아의 위협을 물리칠 수 있는 방안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대원군은 18648월에 베르뇌 주교와 안면이 있는 관장을 통해 만약(주교가) 러시아 사람들을 쫓아낼 수 있다면 종교의 자유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러시아 사람들과는 나라와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8659() 러시아인 수십 명이 다시 경흥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습니다. 러시아의 요구는 대원군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베르뇌 주교와 접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베르뇌 주교와 대원군이 접촉하는 사이, 조선의 지도급 신자들도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책들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신자들의 움직임은 186512월 하순에서 18661월 중순 사이에 본격화되었습니다. 당시 김계호 토마스, 홍봉주, 이유일 등은 러시아의 위협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일이며, 이를 위해 조선에 와 있는 서양 주교들을 이용하라는 방아책(러시아를 방비하는 대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하기로 했습니다. 김계호가 먼저 서한을 올리고 이어 남종삼도 서한을 작성하여 대원군에게 직접 전달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주교가 러시아인들을 막을 수 있는지를 확인한 후 주교와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김계호는 베르뇌 주교에게, 이유일은 다블뤼 주교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고 이에 따라 각기 지방에 있었던 다블뤼 주교는 1866125일에, 베르뇌 주교는 129일에 서울로 상경하였습니다.

주교들이 도착하자 남종삼은 131일 대원군을 찾아가 주교들이 서울에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은 약속과는 달리 주교들과의 면담을 미루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인 1866219일에 최형 등이 체포되었고, 223일에는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가 체포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대원군의 마음이 변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러시아의 월경행위가 잠잠해지면서 위협이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즉 대원군이 교회와 접촉하도록 만든 러시아의 통상 요구가 사라졌기 때문에 굳이 서양 주교를 만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중국에서 서양인들을 처형하고 있다는 사신의 보고가 18661월에 도착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대원군으로 하여금 서양인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라는 대신들의 압력이 있었습니다. 결국 대원군은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상황에서 대신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천주교 측과 교섭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원군은 조정의 주장을 따랐고, 그 결과 병인박해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순시기 보내시느라 수고 많으셨고 부활 축하드립니다.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 박해를 견뎌내신 요당리 성지의 순교자들의 전구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