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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성지 신부님 글

양근성지에서 온 편지 12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4-12-01 조회수 : 28

+ 스스로 생각하는 용기


  어느덧 2024년을 마무리하는 12월입니다. 올 한 해 양근성지에 베풀어주신 사랑과 기도에 감사를 드리며 2024년 마무리 잘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른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구나”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스무살이 넘는다고 모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진짜 어른’, ‘참된 어른’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면 가짜 어른도 있다는 것이겠죠? 진짜 어른, 가짜 어른이 있다면 우리에게 진짜 어른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이 있기는 할까요? tv와 신문을 보면 매일 어른 같지 않은 어른들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먼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우리가 태어나 자라온 특정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그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18세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진정한 어른이란 주어진 상황 안에서 주체성을 가지고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칸트가 살았던 18세기는 계몽운동의 시기였습니다. 계몽운동이란 어둠을 연다는 한자어의 뜻 그대로 비판 없이 종교나 습속을 따르던 이전의 삶의 방식(어둠, 무지)에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밝은 곳에서 확인함으로써 인간을 그릇된 생각에서 해방하고, 인간 사회를 이성적으로 만들려는 ‘사상운동’ 이었습니다. 이는 인간과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기존의 생각과 가치관을 의심하고,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였는데 칸트 또한 철학자로서 이러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칸트는 1784년 쓴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계몽의 모토는 “자기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여기서 오성이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해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하기 때문에 이 모토는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스스로 생각하는 용기를 가지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칸트가 태어나기 약 백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베이컨은 학문과 기술에 큰 혁신을 이루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한 혁신의 출발점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 즉, 그릇된 선입견이나 편견을 먼저 씻어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입견이 있으면 어떤 것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이컨은 그의 저서 ‘노붐 오르가눔’ 즉, ‘새로운 도구’라는 저서에서 자연을 연구하기 위해 철학이 예로부터 사용해왔던 도구를 버리고 새로운 도구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베이컨이 말한 네 가지 우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종족의 우상으로 인간 정신의 습성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일을 미리 단정 짓고 단순화하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자기 생각에 이끌려 많은 것을 놓치곤 합니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입니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성향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을 선호하는지는 각기 다르지만 이러한 성향에 따라 우리의 시야가 좁아진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시장의 우상인데 이것은 사람들이 나누는 말이 정확히 정의되지 않아서 발생합니다. 베이컨은 이것이 가장 성가신 우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 비춰 보면 부적절한 언어 사용이 우리 사고에 미치는 폐해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넷째는 극장의 우상입니다. 때로는 학설의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연극에 아름다운 결말이 있는 것처럼 철학적인 토론을 할 때도 요령껏 마무리하면 사람들을 속이는 토론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이컨이 지적하는 우상은 우리의 지성에 영향을 주며 지배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는 것에 큰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권력과 권위가 넘쳐납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데카르트는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서 자기 나라의 법률과 관습을 따르며 한편으로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사실 허위일지도 모른다. 선악조차 날조된 것인지 모른다. 애초에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과 마주하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의심할 용기를 발휘하면서 그 과정이 만용 되지 않도록 먼저 행동방침을 제시한 것 같습니다.  

  칸트는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상태를 미성년 상태라 합니다. 또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본인의 책임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는 진짜 어른이고 철학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철학을 한다는 것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용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끝으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철학자 토마스는 예수님의 부활을 불신하며 나는 그분의 상처를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스승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며 신앙을 고백하고 비로소 믿었습니다. 

  맹목적이고 복종 지향적인 신앙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묵상하고 회개할 때 비로소 참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  

 





2024년 12월 하느님은 스스로 생각하는 성숙한 어른이 되길 바라십니다.

양근성지 전담 권일수 요셉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