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3월 말이 되니 날씨도 많이 따뜻해지고 따뜻한 것을 넘어 덥게도 느껴지는 때입니다. 잔디밭에도 초록색 싹들이 여기저기 올라오며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풀리니 성지에도 순례자들이 많이 찾아오고 계십니다. 날씨가 좋은 4월, 5월의 순례 예약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좋은 날씨에 사람들이 반응하는 것처럼 좋으신 하느님께 맞갖게 반응하는 신앙인이어야 하겠습니다.
지난달에 예고해 드린 것처럼 이번 달부터 윤형중 신부님의 <상해천주교요리>의 교리 내용을 선택해 그 해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천주’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천주교’ 인입니다. 이러한 ‘천주’ 는 무엇인지에 대해 아는 것이 교리에서도 첫 순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천주(天主)’ 는 글자로만 본다면 ‘하늘의 주인’, 즉 임자란 뜻입니다. 그런데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 있으므로 이 땅까지 자연히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천지, 즉 우주의 창조주란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천주(하느님)를 종종 ‘야훼’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나는 있는 자 그다.”, 즉 “나는 곧 나다”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 알려줘야 하냐고 여쭙자,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이름이었습니다. “나는 곧 나다” 란 본래 있는 자, 존재를 본질로 하는 자, 존재가 그의 본질인 자란 뜻입니다. 나를 포함한 우리 피조물은(나 스스로 나를 만들지 않았으므로) 창조를 받아서 존재하고, 또 허무로 돌려 보내지면 허무로 돌아갈 수 있으므로 존재가 우리의 본질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름, “나는 곧 나다”란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는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자(自存者)’란 뜻이요, 없을 수 없이 있는 ‘필연유(必然有)’ 란 뜻이요, 다른 것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있는 ‘자유(自有)’란 뜻입니다. 마치 불의 본질은 뜨거움이므로 불이면 뜨겁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존재가 본질이요 본질이 존재인 그는 없을 수 없이 있는 영원 자존자이십니다.
천주는 완전할 수 있는 대로 완전하여 아무런 제한도 없으신 분입니다. 제한이란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된 그 범위로 제한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위의 말처럼 ‘영원 자존자’ 이시므로 거기에 아무런 제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천주는 아니 계신 데 없어 곳곳이 다 계십니다. 마치 유리공을 밖에 내놓으면 태양 광선이 공의 속속들이 어디든지 있는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는 이 우주 어디든지 계십니다. 나뭇조각이 물에 떨어지면 그 가운데 떠 있게 됩니다. 즉 나뭇조각이 물에 닿기 때문에 뜹니다. 그 닿는 면에는 나뭇조각에 물이 있습니다. 물이 거기 있지 않으면 나뭇조각이 뜰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주는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창조를 받을 때 그것이 무엇이든지 거기 하느님이 계십니다. 마치 나뭇조각이 뜰 때 거기에 물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천주는 어디에도 계시지만 무한히 완전하신 분이시므로 계시는 그것들로부터 티끌만 한 영향도 받지 않으십니다. 계시는 것들로 인하여 변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말간 병에 맑은 물을 가득 담아 창턱에 내놓으면 햇살이 그 액체를 통하여 들어오지만 그 물 때문에 빛이 젖었다든가 차가워졌다든가 뜨거워졌다든가 하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음과 비슷합니다.
천주는 어디든지 계시므로 모든 것을 아시며, 또 만유의 제1원인이시요 창조주이신 만큼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아시며 모든 사람들의 은밀한 생각을 온통 한꺼번에 다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시므로, 우리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되는 것을 그분은 모두 한꺼번에 한 현재로 아십니다.
천주는 사람이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지조차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알고 계신 그대로 ‘틀림없이’ 될 것이라는 말이지, 강박성을 띠는 꼭 그대로 되어야 한다는 ‘억지로’ 라는 말과는 구별됩니다. 하느님께서 아시는 대로 틀림없이 되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자유는 죽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살아 있습니다.
한 학생이 자기 어머니에게 하느님께서 우리가 지옥 갈지 천국 갈지 아실 것이고 우리는 꼭 그대로 간다고 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가 지옥에 가리라는 것을 아신다면 아무리 주일 미사 참례를 해도 결국 지옥 갈 것이니 쓸데없는 짓이고, 우리가 천국에 갈 줄 아신다면 주일 미사 참례를 하지 않아도 천국 갈 것이니 주일 미사는 필요가 없지 않냐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학생은 놀러 갔습니다.
학생이 종일 놀고서 저녁때 피곤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저녁 준비도 안 하고 계셨습니다. 이유를 묻자,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굶어 죽을 것으로 아신다면 우리가 아무리 저녁밥을 잘 해 먹어도 결국 우리는 굶어 죽을 것이니 필요 없을 것이고, 굶어 죽지 않을 것으로 아신다면 우리가 저녁밥을 안 먹어도 결국 무사할 것이니 또한 필요 없는 것이다.” 학생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어머니, 잘 알았습니다. 다음부터는 미사 참례를 잘하겠으니 어서 저녁밥을 해주세요.”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지 정확히 아시지만 그대로 쓰도록 강요하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번 달은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