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성목요일 만찬미사에 봉독되는 예수님의 발씻김 이야기에서 늘 시선을 끄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 시선이라는 것은 아마도 누군가에겐 무언가 모르게 안쓰럽기도 하고, 마치 처량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애잔한 것이기도 한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기분은 썩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실망감을 주는 것도 아닌 역할을 하고 있는 그 인물은 바로, 베드로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십시오.”(요한 13,6.8ㄱ.9) 만찬장에서의 베드로의 말들은 앞으로 자신과 스승님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장담이고, 그 일들을 안다 하더라도 스승께서 말씀과 행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시고자 애썼던 아버지의 뜻에는 전혀 가까이 가지 못할 공허함을 더할 뿐인 말들임을 느낍니다. 하지만 스승님은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너희는 깨끗하다.”(요한 13,7.10) 라고 부족한 제자를 독려하십니다.
성목요일과 수난의 중심을 지나 부활의 소식이 전해지는 새벽녘의 여명도 반복하여 지나게 된 우리들이지만 아직도 남아있는지 모르는 사도 베드로를 닮은 어린 아이 같은 어수룩함은 좀 잦아들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지금 이 부활시기에 가지게 됩니다.
뒤돌아보건대, 마음 속 작은 불편함이나 나를 거스르는 다양한 요소들이 조금씩 자신을 괴롭힐 때조차 바로 흔들리고 스스로를 깨뜨리기 바쁜 내 자신은 아니었는지, 늘 다시 나에게 주어지는 신앙의 소명을 부활과 함께 받아들여봅니다. 베드로에게 그러했듯이 우리들에게도 삶에 담긴 아버지의 뜻은 성모님처럼 마음속에 깊이 품을 때 비로소 겨자씨와 같은 열매를 맺기 시작할 것이기에 말입니다.
세상 구원이 달렸다 선포하는 교회와 일치하여 우리가 노래했던 그 승리의 십자가, 그 나무는 아마도 겨자씨와 같이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삶의 조각에서 시작된다 하더라도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마태 13,32)이는 열매를 우리에게 주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요한 15,4ㄴ) 가지가 되어가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베드로와 같을 때에도, 때로는 유다와도 같이 온통 나만의 관념으로 가득 찰 때에도 늘 변함없이 이 ‘나무로부터 길어 올려야’(이사 12,3참조)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그 나무에 달리신 스승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생명과 사랑의 샘’(요한 19,34참조)이 바로 그것이기에 또 한 번 고백해 봅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34.)
부활하신 분께서 남겨졌던 이들에게 나타나셔서 몇 번이고 반복하셨던 말씀을 새겨봅시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3) 성령으로 말미암은 평화를 누리며 우리는 우리를 속이는 것들에서 벗어나 진리에로 다가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요한 21,4ㄱ) 물가에 서 계셨던 스승님께 비추임 받아 삶의 풍파 속에서도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2ㄱ)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교자들과 같이 시련을 이겨내며, 신뢰를 잃지 않을 때 마침내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닮게 되리라 믿습니다. “나는 내 영광을 찾지 않는다. 그것을 찾아 주시고 또 심판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9,50.54ㄱ.55ㄱ)
십자나무의 승리를 이루신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희망과 기쁨의 부활시기 건강히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