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시기가 시작되자마자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다. 평생을 교회에 헌신하신 교황님이 서거하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소임을 하셨던, 소외된 이들을 안타까워 하셨던 교황님이다.
로마교황청은 교황님의 유언에 따라 소박한, 번거롭지 않은 장례예식과 교황청이 아닌 시내의 대성당으로 무덤을 정했다. 야트막한 언덕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다.
내가 2년전 로마에서 6일을 지내며 최후의 만찬미사를 드렸던 곳이다.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세 시간에 걸친 미사였다. 장엄한 미사에 내 자신의 생애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어 경건하게 드렸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찾아보고 싶다.
부활, 죽은 이가 다시 살아온다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살아계셨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조차 의심을 하며 손을 대기도 했고 그럴 리가 없다며 손 사레를 치거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부활의 의미를 묵상해본다. 매우 사랑했던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고 치자. 그 사람은 열심히 하느님을 믿고 따랐으니 당연히 예수님처럼 사흘이 아니나 더 늦게라도 다시 살아 돌아오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당연히 그런 경우는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부활은 없는 것일까. 우리가 죽은 다음에 만나는 세상을 다녀오지 않았으니 있다고도. 없다고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부활은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가다듬는 것이 아닐지. 새로운 자신을 만들려면 많은 것들을 버려야한다. 타인을 무시한다거나 미움과 증오가 가득한 모습, 타인은 물론 자신을 기망하고 속이는 행위 등등 부정적인 요소가 많이 있다. 단점과 무심코 행한 적대적인 말, 부정적인 생각 등을 하나씩 꺼내어 과감하게 버리면 잘 살 수 있다. 그런 과정이 우리의 부활이라 생각해본다.
물론 쉬운 것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하면 버려야 할 것들이 보일 것이며 앞으로의 삶에 방해가 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만의 부활을 만든다면 조금은 하느님을 따르며 다다를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크로스토퍼 바타유의 다다를 수 없는 나라) 프랑스에서 베트남으로 가서 선교를 하다 순교한 수녀님의 기도문이 가슴에 와 닿았다.
“주여, 저에게 당신을 사랑할 힘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