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늘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요당리 성지 후원회, 형제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6월 6일 교구 인사 발령이 있었는데요, 이번에 제가 안식년을 받고 요당리성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요당리성지에 부임한 지 벌써 6년의 시간이 흘러 이제 인사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호가 제가 요당리 성지에서 드리는 마지막 회보가 될 것 같습니다. 이동하게 되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감사’입니다. 지난 6년간 변함없이 성지를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신 후원회 형제, 자매님과 순례자 여러분들이 계셨기에 무사히 저는 제 임기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마지막 회보에 어떤 말씀을 드릴까 생각하다가 요당리 성지는 장주기 성인의 성지니까 장주기 성인에 대한 말씀을 드리며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순례철에 강론 때에 드렸던 말씀이기에 이제는 장주기 성인에 대해 외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장주기 성인은 1803년에 이곳 요당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장성하셔서 가족들을 모두 천주교 신앙으로 인도하신 후에 박해자와 비신자의 눈을 피해 고향인 이곳을 떠나 여러 교우촌을 전전하시다가 1845년 제천 베론 교우촌으로 이주하십니다. 평소 계명을 잘 지키시고 신앙의 모범을 보이셨기에 회장으로 임명되셨고, 이에 죽으실 때까지 독실히 회장 직분에 헌신하셨습니다.
1855년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대표였던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메스트르 신부님이 조선 국내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우기로 하였고 그 장소로 높고 험한 산들로 완벽하게 둘러싸인 작은 골짜기 베론이 선택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에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제천 베론에 세워지게 됩니다. 이때 베론의 회장이었던 장주기 요셉 성인이 신학교와 연을 맺으십니다. 신학교 건물로 쓰라고 초가삼간 자신의 집을 봉헌하시고 신학교 살림살이를 맡아 운영하신 것이었습니다. 3명의 조선의 신학생들에게 한문도 가르치시고, 두 분의 학교 신부님이신 교장 푸르티에 신부님과 프티니콜라 신부님을 도와 성실히 신학교에 봉사하셨습니다. 푸르티에 신부님의 오른팔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부님들을 도왔고 두 분 신부님은 장주기 성인을 무척 고마워하였습니다. 그렇게 11년 동안 안전하게 신학교가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장주기 성인의 신중하고 솜씨 있는 운영 덕분이었습니다.
1866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박해인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학교도 이 박해의 여파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포졸들이 들이닥쳐 신학교가 폐쇄되고 두 분 신부님과 함께 장주기 성인은 체포가 됩니다. 교장 푸르티에 신부님이 장주기 성인을 살려주려고 포졸들에게 돈을 주어 성인이 풀려나게 되고, 두 분 신부님은 끌려가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십니다. 그러나 성인은 다시 체포되어 관할인 제천 관아로 끌려가십니다. 그곳에서 신부님들과 함께 있었고, 신학교 집주인이었으며 천주교 신자임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고백하십니다. 서양 신부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기에 중죄인으로 지목되어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십니다.
서울 포도청에서 두 차례 혹형과 함께 심문을 받으셨지만, 성인은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십니다. 관장이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살려주고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지만, 성인은 만 번 죽더라도 만 번 하느님을 배척할 까닭이 있겠느냐며 관장의 회유를 거절합니다. 평소에 순교로써 예수님이 구원해 주신 은혜에 보답하기가 소원이라고 하였는데 소원대로 사형판결을 받고 순교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네 분의 103위 성인과 함께 순교하시게 되었는데 당시 다섯 번째 주교님이셨던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다블뤼 주교님과 오메트르 신부님, 위앵 신부님, 황석두 루카 회장이 그분들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교에 있었던 성인은 성직자들과 함께 죽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하셨습니다.
사형지는 충남 보령 갈매못의 바닷가 모래사장이었습니다. 수군 군영이 있던 곳인데 때마침 예수님이 돌아가신 성주간 성 금요일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의 요청으로 바뀔뻔한 사형집행일이 성 금요일에 그대로 집행되게 되었습니다. 주교님이 먼저 칼을 받고 순교하시고, 그다음 오메트르 신부님, 위앵 신부님, 황석두 루카 회장이 칼을 받고 마지막으로 장주기 요셉 성인이 칼을 받으셨습니다. 칼을 받을 때까지 성인은 기도가 끊이지 않았고 마지막 칼을 받을 때는 주위를 둘러보며 “우리가 이렇듯이 죽음은 거룩한 천주교에 영광이라.” 하시며 칼을 받으시고 참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1866년 3월 30일 성인의 나이는 64세였습니다.
요당리 성지를 떠나며 저와 후원회 여러분과 순례자 여러분을 성인의 전구에 맡겨드립니다. 6년 동안 보살펴주신 성인의 전구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저의 사제생활과 여러분들의 신앙생활 안에서 변함없이 성인께서 하느님 나라에서 기도해 주실 것입니다. 살아계실 때는 물론 순교에 이르기까지 충실하게 계명을 지키시고 신자의 본분을 다하시며 하느님께 충실하셨던 성인을 닮기를 청합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 가는 여정에 순교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순교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유혹들을 이겨내고 죄를 피하며 성덕을 쌓아 성인이 올라가신 하느님 나라에 우리도 올라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께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올리며 기도 중에 계속 기억하겠습니다. 요당리 성지 변함없이 아끼고 사랑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강버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