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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밀알 하나] 27년 전, ‘거지 할머니’의 추억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2-04-01 조회수 : 729
   사제품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다. 그러니까 2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공소 회장님과 상의할 일이 있어 회장님 댁을 방문했는데, 매 끼니 때면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먹는 한 ‘거지 할머니’를 만나게 됐다.
 
   그날은 공소회장님 댁에서 밥을 먹기 위해 왔는데, 마침 내가 방문한터라 공소회장님 부인께서는 할머니를 돌려보냈다. 그 사실은 안 나는 곧바로 “저 때문에 식사를 굶으시면 안 되죠. 가서 모셔 오세요”라고 전했다. 할머니를 다시 집안으로 모셔와 한 식탁에 둘러 앉도록 했다.
 
   할머니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고,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흰 공단 저고리와 치마는 언제 빨았는지 누렇게 변하고 더러워졌으며, 계속 콧물을 닦아낸 소매는 반질반질 윤이 났다. 공소회장님 댁 자녀들은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할머니는 너무 감격하셨던지 눈물을 흘릴 뿐 아니라 연신 콧물까지 훌쩍였다. 게다가 지저분하게 흐르는 콧물을 할머니가 훅 들이마시니 아이들의 입맛이 더욱 없어졌을 듯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께 울지 말고 식사를 하시라 말씀드렸더니, 할머니께서는 더욱 크게 소리 내어 우시며 입을 열었다.
 
   “신부님, 저 신자입니다.”
   세례명은 마리아였다. 냉담한 지 20년이 되었고, 아들이 둘이나 있지만 누구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공소회장님께 이번 주일부터 할머니를 성당에 모시고 나와 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주일, 마리아 할머니는 정말 성당엘 오셨다. 미사 중에 할머니를 얼핏 보니 계속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눈물과 함께 덤으로 콧물도 흘러내렸다. 할머니가 훌쩍거릴 때마다 콧물은 길게 늘어졌다, 들어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강론 중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면 할머닌 울다 말고 천진난만하게 웃으셨다.
 
   이후 마리아 할머니 삶의 가장 큰 기쁨은 미사 참례가 됐다. 행복해하는 할머니 덕분에 덩달아 내 마음에도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이영배 신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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