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7일이면 교구가 설정 된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교구는 50주년을 기념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영적 쇄신’이라는 교구장님의 사목교서 발표와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교구 설정과 함께 걸어 온 나의 사제 생활을 회고해 보고자 한다.
나는 본래 서울대교구 소속 신학생으로서 유학 계획에 따라 부제품을 받기 직전인 1960년 군 입대 1년 만에 유학 제대를 하고, 1961년 8월 말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신학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미 서울 대신학교에서 철학 2년, 신학 3년을 이수했기에 사제품을 받기 위해서는 1년만 더 신학을 배우면 됐지만 3년을 더 공부하기로 했다. 때마침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최되면서 한국 주교님들이 공의회 참석차 로마에 오셨기에 당시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님께 유학 계획을 말씀드렸고, 대주교님께서는 수품 후 학위 취득까지 5년간 유학을 허락하셨다.
이후 1963년 10월 7일 교구가 서울대교구로부터 분리되면서 초대교구장으로 윤공희 주교님이 부임하셨다. 당시 나는 아직 신학생이었기에 고향 소재지(왕림본당)를 따라 교구 소속이 됐다.
1963년 말, 부제품을 받기 위한 서품 청원서를 새 교구장 주교님께 올렸고, 부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964년 3월 14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바오로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게 됐다.
나는 유학 중 신학을 3년간 반복했기에, 대신학교 3년 후배였던 동생 최경환 신부보다 3개월 늦게 사제품을 받았다.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1961년 3월에 사제품을 받았을 것이다. 나의 동창 신부들은 2011년 3월, 50주년 금경축을 맞았다. 나도 그랬다면 지금 교구가 아닌 서울대교구에서 사제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히브 10,9)라는 사제서품 성구를 품은 채, 어릴 적 사제의 꿈을 키웠던 고향이 속한 교구에서 지금까지 사제생활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