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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소식

본당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 인터뷰

작성자 : 전창남 작성일 : 2012-12-10 조회수 : 888

 
   수원대리구 고등동본당은 1959년 11월 25일 북수동본당으로부터 분리된 후, 1963년 10월 7일 초대 윤공희 주교가 교황 바오로 6세의 칙령으로 서품되고, 동년 12월25일 착좌식을 거행한 곳이다. 또한 제2대 김남수(안젤로) 주교도 고등동주교좌성당에서 1974년 11월 21일 주교서품식 및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성당이 낡고 비좁아 새로운 대성당으로 신축한 후, 주교좌성당이라는 표지가 없어졌다하여 공동주교좌성당에서 제외가 되었다. 이에 현재봉(베드로) 신부는 교회법을 전공한 신부들에게 수차례 문의와 자문을 받고, 또 교구장 이용훈(마티아) 주교에게도 본당의 이러한 사정을 말씀드린 바 있다.
 
   2013년 10월 7일 교구설정 50주년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교구의 역사는 곧 고등동본당의 역사에서 시작인바, 50년 전 교구 출발 당시의 상황을 재조명하고, 주교좌성당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먼저 초대 교구장이셨던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님을 찾아뵙고 말씀을 들었다.
2012년 11월 14일 멀리 (전남 나주시 남평읍 남석리 170. 광주가톨릭대학교 내 대주교님 공관) 대주교님을 인터뷰 하기위해 동행한 사람은 현재봉(베드로) 신부와 이희구(모니카) 수녀, 윤석철(안토니오) 총회장, 전창남(프란치스코) 노인성경대학장, 안순분(마르첼라) 홍보분과장, 배근식(살비오) 재정분과장이 함께 했다.
 
   고등동본당에서는 공동주교좌성당 명의를 되찾고 고등동본당 역사자료관 설치 추진을 위해 윤공희 대주교를 방문했으며, 윤공희 대주교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을 토대로 자료를 수집할 예정이다. 이하는 윤공희 대주교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전창남 : 대주교님 근황도 뵙고 몇 말씀 여쭙고 싶습니다. 저희 고등동성당이 초대 주교좌 성당인데, 그동안 성당이 좁고 낡아서 새로 크게 짓다보니까 초대 주교좌였던 표식이 전부 없어졌어요. 대주교님이 사시던 곳이 성당 맞은편 적산가옥에 주교관이 있었었나요?
   대주교 : 아마, ‘적산가옥’ 일거야. 그때 당시 사진을 안 찍어서 남아 있는 게 없을 거야, 그림을 그리는 게 낫겠군. 설명을 하자면,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부지가 삼각형으로 되어있었어, 이런 모양으로, 이 길로 쭉 나가면 여기가 수원여고인가? 그리고 화서동으로 가고, (현신부 - 예, 맞아요), 이리로 쭉 나가면 큰 길이 있고, 이쪽이 수원역이고, 여기가 성당 터였고, 여기에 하나의 건물이 있었어, 이 길이 이렇게 있는데 여기에 집이 있었지, 여기에 살았어, 이쪽이 좀 언덕이야, 조금 높아요. 여기에 적산가옥이 또 하나 있었고, 여기가 신부님 두 분이 살았어. 이곳을 맨 처음 주교관으로 사용한 거야, 방이 마루 같은 방이 있었고, 부엌이 있고, 나 혼자 살았어, 그리고 수녀님이 사시고, 그것이 전부야. 사제관이 있고, 처음 비서신부로 선발된 신부님이 오셨는데 공간이 부족해서 나중에 이 집을 빌렸어, 앞에 집을, (현신부 - 건물이 그러면 앞, 뒤로 있었던 것입니까?) 그렇지, 건물이 여기에 있고, 이 아래로 또 하나 있었어, 이것은 우리 거고 이것은 다른 사람 것을 빌렸어, (현신부 - 그러면은 주교님이 거하시던 곳은 이 앞쪽인가요), 응 이 앞쪽이야, (현신부 - 그럼 이 뒤쪽은 어떤 용도로 쓰신 건가요? 장금구 신부님이 총대리가 됐으니까, 그때는 본당은 안 맡고 사용한 것 같아.
 
 
 
   현신부 : 대주교님이 63년도에 주교로 피선 되시어 오시고 나서 24개 본당의 우리 수원교구였지만 그때 당시 대주교님께서 교구의 편재를 어떻게 두셨고, 교구청의 역할을 어떻게 어디서 하셨는지요?
   대주교 : 교구야 뭐 나하고, 손 비서신부, 수녀님이 사셨고, 여기 유치원하고 수녀님이 사셨는데, 여기가 방, 식당, 부엌, 큰 방이 있었고(그림을 그리면서), 여기 방 하나가 교구청 역할을 하였지, 직원은 나하고 손 말로 비서신부, 장금구 신부님이 부주교로 총대리 신부 이 인원이 다지. 나중에 비비안나 수녀가 직원으로 들어왔지.
   전창남 : 제가 가톨릭 신문에서 한 번 보았는데요, 그때 교구청이 의자 6개, 방이 4개였고, 교구청 신부님들이 두 분은 로마에 유학중이시고, 교구청에 신부님이 두 분밖에 안 계셨다고 했어요.
   대주교 : 그 얼마 후에 김춘호 신부가 와 있었어, 신부가 둘 이었는데, 손말로 신부는 사무국장이고, 장금구 신부님이 총대리 신부 겸 관리국장 임무도 맡아 둘이 다했지. 그러다가 3년 후에 화서동 새 교구청으로 이사 갔지.
   현신부 : 그리고 우리 성당위치와 주교관 위치와 관련해 가지고, 이 성당 터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이 건너편은 여기 밖에 없고, 적산가옥도 이곳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때 적산가옥이 지금은 지붕만 바꿔서 건물이 그대로 있습니다.
   대주교 : 여기가 약간 오르막이야, 여기가 입구고, 예, 주교님 말씀대로 지금도 오르막이고 그 옆에 건물이 또 하나 있는데, 주교님 말씀하신 가옥이 그대로 있습니다.
   대주교 : 여기가 골목이 있었는데...
   현신부 : 맞습니다. 골목이 그대로 있습니다.
   대주교 : 여기에 여고가 있었어.
   이수녀 : 대주교님께서 지역을 확실하게 아시네요.
   윤석철 : 아, 이제 좀 풀렸네.
   대주교 : 나는 임명 받기를 10월 7일에 받았는데, 발표는 10월 9일이고 서품식 날자는 로마에서 정해져 있었어. 공의회 기간인데 임명받고 부랴부랴 로마에 갔으니까. 63년 10월 7일이 공식문서 날자 이고, 내가 통고받은 것은 9일 날 자여, 그리고 발표는 4일 후인가 했어요. 그때는 공의회가 열려 있는데, 공의회가 4년 동안 했어요. 62년부터 매년 10 월 달에 한 달간씩 했는데, 공의회가 두 번째 할 때였어. 10월 25일 전교주일날 교황님이 직접 서품을 준거여. 나는 서품 받고 착좌식은 못하고 공의회부터 들어간 거야. 그래서 수원에 연락하고 착좌식 날자 를 잡자고 했지. 그래서 착좌식은 미사는 안 드리고 성체강복, 말씀의 전례 식으로 간단하게 했어. 잔치할 만한 자리가 없어 농대 큰 강당을 빌려 거기서 파티를 하고, 축하금을 받고서 처음으로 수원교구 장부를 시작 한 거야. 수입이 그날 받은 예물이 입금인거야. 얼마동안 장부를 내가 썼지 뭐야. 그날 받은 예물이 교구재정의 첫 번째 수입이야. 나는 교황님의 칙령으로 어느 날 자에 주교가 되었다는 그것뿐이지 서울교구에서는 아무것도 안 받았어. 축하식 때 선물은 주었겠지.
 
 
   현신부 : 그리고 우리 주교좌가 되는 데는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쓰미빠스토리스(최고목자)라는 교서를 내면서 수원교구에 관할을 쭉 열거하시다가 그리고 ‘이 교구에 주교는 그 자기 주교좌를 수원시에 두고 또 그 교좌를 같은 곳에 있는 성요셉성당에 두기를 원하며’ 이렇게 내용이 나오는데, 이렇게 매번 새로운 교구를 낼 때 이와 같은 내용으로 내 주시는가요?
   대주교 : 그렇지, 그건 교황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이니까? 교황님이 주교를 하나 내고, 교구 안에 주교좌가 있어야 돼. 주교좌는 어느 성당이다. 그래서 이걸 바꾸거나 다른 성당으로 하려면, 교황청에 연락을 해서 다시 신청을 하고, 교황청에서 승인이 나와야 해. 내가 듣기로는 김남수 주교님이 조원동을 주교좌로 하고 고등동을 공동주교좌로 한다고 했어요.
   현신부 : 그러면 주교좌가 교황청으로부터 정해져서 반포가 되면 그 성당을 헐고 새로 짓는다 하더라도 그 주교로서의 권위는 그대로 유지가 되는 것입니까?
   대주교 : 그럼, 주교좌는 그 성당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 집이 낡아서 새로 지으면 축성식만 하면 되는 것이니까? 고등동이 주교좌 본당이지. 그렇기 때문에 조원동을 주교좌로 하는 근거가 남아 있을 거야. 내가 김남수 주교로부터 들은 기억으로는 조원동을 주교좌로 한다. 그러면서 고등동은 공동 주교좌로 한다. 그렇게 되면 공동 주교좌가 둘이 되는 거지. 주교좌가 옮겨져서 전 주교좌 본당이라고 하기에 아니다. 지금도 고등동이 주교좌 본당이라고 했어. 공동 주교좌 본당. 공부를 많이 해야 돼.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교계제도가 62년도에 되면서 수원교구, 서울교구 이러잖아, 그전까지는 교구가 아녀, 대목구지, 교황님이 교구장이기 때문에 대리로 주교를 임명하는 거야. 주교는 원칙적으로 주교좌 없이 둥둥뜨는 주교를 못 만들어. 교황님도 어디 주교자리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옛날에는 대목구 일 때에 서울 대목구장을 교황님이 임명하면, 교구장은 교황님 자신이니까 리까르 싸뽀뜨라 했어요. 그런데, 주교라 하니까 주교좌가 있어야 한다. 옛날 아프리카에 주교좌가 있던 데가 없어진 게 많거든. 다 그 명칭은 살아 있는 거야. 그래서 역사에 사라지고 없는 그 명칭을 이용해서 새로히 주교를 임명하는 거야. 그런데 노주교님이 왜정시대에 서울 교구장으로 임명이 돼서 대목구장(아포스트로트)이지. 교황님이 대리자로 교구장이라고 하지만 노주교님을 라틴말로 교구장(비쑈어브 서울)이라고는 못해요. 그때도 비쑈어브콜바사라고, 콜바사가 옛날 아프리카 어느 주교좌인데 없어졌어요. 다 없어졌지만 교회 기록과에는 엄연히 살아 있어요. 평양 주교님이 처음 나올 때는 대목구장이지. 주교는 주교지만, 교구장으로 주교는 주교좌가 있어야 되는데, 평양은 그것이 안 돼 있으므로 서울에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리카리아 아뽀스토(교황 대리구)지. 평양 주교는 명예주교로서 평양 교구의 대목구지. 정식 교구라는 명칭은 62년도부터야. 실제 평양 교구로 말하면 대목구로 있다가 한국에 교계제도가 되면서 교구가 됐단 말이야, 본당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그냥 교구가 됐어요. 정 주교님이 서리로 맡고 있지. 그런데 로마에 연감에는 지금도 대목구 대목으로는 홍 주교님이 그대로 있어요. 홍 주교님은 행방불명되어 돌아가신지 오래 되었지. 지금 주교를 임명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계속 서리만 임명하는 것이지. 고등동은 내가 듣기로는 주교좌인데 문서를 찾아야 돼요. 집은 상관이 없어.
 
   이것은 붉은 수단 입었을 때 썼던 것이고. 이것은 바티칸에서 썼던 것이고, 이것은 수원에서 쓰던 관이지. 이것을 모관이라 하고 이것은 주교관이야
   현신부 : 옛날에 ‘미투라’를 우리말로 모관이라고 잘못 번역을 한 것이네요.
   대주교 : 한 10여 년인가? 한동안 모관이라고 잘못 썼어요.
   이수녀 : 지금도 모관복장 그러잖아요. 그런데 이건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예요.
   대주교 : 옛날에는 이게 통천관이여, 하늘로 통한다 해서 통천관. 아마 중국에서 썼을 거야.
   현신부 : 이 통천관은 주교님이 맨 처음에 쓰시던 미투라 인가요? 그럼, 그러면 의미가 더 있네요.
   이수녀 : 참 귀한 것이네. 진짜
   대주교 : 이것이 착좌 때 사진이야, 그런데 이 지팡이(목장) 이것을 교구에서 가질려고 할거야.
   현신부 : 자 그러면 주교님과 시작기도는 못했지만, 마침기도를 바치고 강복을 받고, 단체사진을 찍고 끝내겠습니다. 주교님, 모두 일어서서 주모경 바침. 저희들 주교님으로부터 안수를 받으면 좋겠습니다. 주교님이 안수를 주시다. 주교님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
 
   지금까지 고등동본당의 공동주교좌성당 명의를 되찾기 위해 고등동본당 역사자료관 설치 추진을 위한 위원들이 윤공희 빅토리노 초대 주교님을 찾아 뵙고, 초창기 당시의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교좌라는 명칭은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교황님의 교서로 정해졌기 때문에 그 이름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 저희는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고, 이제부터 초대 주교님이 교구청으로 사용하시던 그 집을 매입하고, 초기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하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 현장 분위기를 살리고 상세한 내용을 적기 위해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습니다.
 
전창남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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