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마인쯔 교구장인 폴크 추기경님과 약속한 한국에서의 교포사목 신부 파견을 위한 사항들을 당시 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님께 보고하고, 하루속히 후임 신부를 파견해 주십사 청했다.
후임 신부로는 프랑스에서 공부했던 김춘호 신부가 적합할 것이라고 조언을 드렸다. 김 신부는 프랑스 닐에서 유학하면서 독일 광부들도 만났고 독일어도 하고 가능하다면 끝맺지 못한 학위도 이어갈 수 있기에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주교님도 좋게 생각하시고 쾌히 승낙하셨다.
마인쯔 교구와 김 신부 파견에 필요한 서류 절차를 마무리하고 1970년 7월 독일을 떠나 6개월 정도 미국에서 견문을 넓히려 했다. 하지만 미국에 머무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생 신부(최경환 신부)로부터 어머님이 위독하시니 빨리 귀국하기를 바란다는 편지가 왔다. 모든 계획을 뒤로 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1970년 말 그립던 고국 땅에 돌아왔다. 우선 수원 화서동 구(舊) 교구청에 자리를 잡고 북수동 보좌 신부로 발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색동 본당에 가게 됐다. 당시 고색동본당은 세류동본당에서 분리된 신설 본당이었다. 본당 신부가 부임했지만 군종 신부로 가게 됐다는 것이다. 주교님께서는 동생 신부가 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고색동본당을 맡으라고 명하셨다.
허허벌판이었던 고색동본당에서의 사목생활이 시작됐다. 부활 판공을 위해 현재의 안산까지 9개 공소를 한 번 방문했다. 얼마 후 동생 신부가 제대하여 고색동본당을 맡은 후에 나는 다시 교구청에 돌아왔다.
당시 신학교에서는 부제들을 각 교구에 보내 반년 간 실습을 시켰다. 당시 사무처장이었던 조원길 신부와 함께 부제들(현 변기영, 이정운 몬시뇰, 김영옥, 김정원 신부)을 실습 보내고 서품을 준비했다. 이들은 1971년 8월 27일 다른 교구 동창들 보다 먼저 사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