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2월 7일 사제 수품 후 평택본당 보좌로 부임 하자마자 성탄전례와 새해 준비를 하느라 짐 정리도 제대로 못했다.
4개월도 다 채우지도 못하고 다시 이천시 반월성본당으로 이동하게 됐다. 첫 본당의 꿈을 안고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농촌사목을 실습하며 교우들의 모내기와 누에고치, 고추와 담배 잎을 따는 일에 틈틈이 참여하는 등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1976년 10월 말 즈음. 일손이 바쁜 공소 회장님 댁에서 벼 타작을 도와드리고 밤 10시가 다 돼 지친 몸으로 돌아와 보니 “주교님께서 전화를 하셨는데 밤늦더라도 꼭 전화를 하라”는 메모가 있었다.
故(고) 김남수 주교님께서는 “이 신부 서울 가서 5년만 살다 오게…”하고 청하셨다. 교구장이 되신 지 2년이 됐지만 신학생들 등록금 마련이 여의치 않아 동창신부 중 한 명(故 고건선 신부)을 이미 서울교구 보좌로 파견하셨다는 말씀과 함께 서울교구 가르멜회 수도원에서 기거하면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 가서 5년만 지내라는 것이다. 교구 운영 중 신학생 교육이 빠듯하니 타 교구에 가서 파견 근무를 하고 그 대가로 신학생 등록금을 보태시겠다는 가난한 교구 주교님의 안타까운 마음이셨다. 이후 5년 동안 한국천주교회 기도서, 성가집, 전례서, 성무일도서, 미사경본, 교황님의 회칙과 대축일 담화문, 천주교 서적 검열과 출판을 담당했다.
가난한 나라, 가난한 교구. 1960?년대의 국가 상황이 지금의 기준에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이 글을 통해 교구 성장과 발전 이전에 역대 교구장 주교님들의 노고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당시 주교님은 어떻게 지내셨을까? 김남수 주교님은 생활비를 절약하시기 위해 성빈센트병원 별관에 임시 주교관을 정하시고 수녀원 새벽미사를 집전해주셨다. 또한 특별한 일이 없으신 날에는 팔달산을 넘어 화서동 교구청까지 도보로 출퇴근 하셨다. “걸어서 출퇴근을 하니 건강에 좋다”며 환한 웃음을 지으시던 김 주교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