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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시복시성추진위 ‘순교 영성 강학’ 지상중계 (6) - 윤민구 신부(손골성지 전담)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4-06-01 조회수 : 599
신앙의 자유 향한 서양 선교사 요청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이 쓴 과학, 천주교 서적들을 통해 신앙을 받아들였던 조선천주교 신자들에게 중국의 교회와 그곳의 서양 선교사들은 늘 모델이었다.
 
  크고 작은 박해 속 교회는 서양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성직자가 없다는 것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대화의 창구가 없었다는 점 등 태생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과학과 예술에 뛰어난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아울러 정부와 백성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줄 수 있어 박해를 받지 않고 신앙생활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중국에서 직접 서양 선교사를 영입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서양에서 직접 선교사를 영입하고자 했다. 많은 선물을 실은 큰 배를 타고 와 선물과 과학 기술을 보여주면 그들을 기쁘게 맞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서양 선교사들이 합법적인 체류 허가를 받고 나라 발전에 이바지함으로써 순리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구베아 주교로부터 10년 후에는 서양에서 보낸 큰 배가 조선에 도착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더욱 기다렸다. 신유박해(1801)의 고통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큰 배가 오지 않자 마침내 교황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다시 요청했다.
 
   교황청에서는 조선 천주교회에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했고, 마침 파리외방전교회 브뤼기에르 주교가 자원했지만 조선 신자들은 주저했다. 그들이 희망하던 바와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떳떳하게 들어와 나라 발전도 이롭게 하고 신망도 얻을 때만이 비로소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불식시키고 복음 전파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몰래 들어오게 되면 그를 숨기기 위해 또 다시 목숨을 걸고 희생해야 할 이들이 많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브뤼기에르 주교는 알 수 없었다. 그는 파문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조선인 사제 양성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를 맞아들이기로 했지만 그는 조선에 오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대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몰래 들어와 최선을 다해 사목 활동을 했지만 예상대로 그들을 숨기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이후 박해로 그들은 모두 체포됐다. 조선 정부는 그들과 그들을 잠입시킨 조선 신자들도 모두 처형했다. 그러자 프랑스 군함이 책임을 추궁했다. 때문에 조선 정부와 백성들은 더욱더 천주교 신자들과 서양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불조약이 신앙의 자유를 터주게 됐지만, 갈망해왔던 것과는 사뭇 달라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교회를 세우고, 수많은 박해 속에도 참된 하느님의 교회를 지키고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이 같이 노력했던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노력을 잊지 말아야겠다.
 

정리 이우현 기자 (helena@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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