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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시복시성추진위 ‘순교 영성 강학’ 지상중계 (7) 신유박해와 순교자들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4-06-15 조회수 : 601
사대부·평민·궁녀 등 다양한 구성원이 신앙 명맥 유지
   정조는 교화우선 정책을 펼쳤다. 천주교를 명청(明淸) 문화 수용과정에서 일어난 유사 및 지엽성에 치우친 말단 현상으로 보면서 유학을 크게 천명하면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봤다.
 
   1791년 초, 통공정책으로 난전착납 권리를 빼앗으며 노론의 정치자금 공급원을 차단했다. 이는 노론을 뿌리에서부터 붕괴시키려는 조치였다.
 
   이에 노론의 반격이 일어났고, 윤지충의 진산사건으로 신해박해가 일어났다. 1795년 을묘박해 때는 한영익의 밀고로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후, 포도청에서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순교했다. 노론은 이가환과 이승훈을 공격 했고, 정조는 좌천을 시켰다.
 
  이후 순조가 즉위 했고,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노론 벽파의 등장으로 남인시파 세력이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정순왕후는 1801년 1월 10일 천주교 처벌우선 정책의 금압령(五家作統法)을 내렸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남인계열의 사대부 ▲실질적인 교회 지도층 ▲초기 천주교 수용의 주체집단(중간계층의 교회 지도자) ▲평민지도자(교회의 확산에 중심 역할) ▲비판적 지식인(용감한 순교) ▲평민, 노복, 부녀자, 궁녀 등 가장 숫자가 많은 다양한 집단 등으로 구성돼있었다.
 
   신유박해로 비판적 지식인 그룹까지 무너졌으나, 평민, 노복, 부녀자, 궁녀 등 그룹과 소수의 실질적인 교회 지도층부터 평민지도자까지 그룹의 사람들이 살아남아 교회를 일으킬 수 있었다. 즉 교회 조직이 다양했기에 박해 이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박해의 목적이 정치적인 이유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신유박해의 순교자 중 53분이 ‘하느님의 종’이다. 1791년에 윤지충과 권상연, 1793년부터 1800년까지 12분이다. 신유박해로 남인 핵심계 인물이 제거됐고, 남인영수 채제공의 관직이 추탈됐으며, 남인의 중앙정계 진출이 불가능해졌다. 1801년 12월 22일에는 반교문(頒敎文)이 발표됐다.
   1775년 부친 황석범(1746~1775)과 모친 이윤혜 사이에서 태어난 황사영은 1790년 진사(進士)에 급제했다.
   정명련(마리아, 1773~1838)과 결혼하고 입교했으며,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을 얻어 활발한 신앙생활 및 전교활동을 펼쳤다.
   1801년 2월 10일 그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는 2월 말 배론으로 이주했고, 9월 22일 백서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는 9월 29일 체포됐으며, 11월 5일 능지처참으로 순교했다. 또한 11월 7일 가족들도 유배를 떠났으며, 모친은 거제도, 부인은 제주도, 아들은 추자도 관노비로 유배됐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작성한 백서는 글자 수 1만3384자로, 발신자 토마스, 수신인 구베아 주교로 돼있으며, 인사말(1-5행) 작성동기, 신유박해의 진행과정(6-32행), 순교자들의 열전(32-90행),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90-118행), 관면요청과 맺음말(119-122행) 등으로 구성돼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정부는 이 백서의 내용을 서양 선박 청원 등을 빌미로 국가에 대한 반역 의도로만 이해, 박해의 이유로 삼았다.
 

정리 이우현 기자 (helena@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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