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위령성월을 맞아 ‘늘 깨어 준비하는’ 구원과 죽음의 영성을 실천하기 위해 ‘전 신자 유서쓰기 운동’을 전개했다. 그 당시 놀라왔던 일은 많은 분들이 유서를 쓰는 것을 주저하거나 두려워했던 것이고, 유서를 쓰신 분들은 그 이후 한분도 돌아가시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탄생을 준비하듯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지를 헤아렸는데 ‘나의 죽음’은 어디에서든 언급되어서는 안 되는 금기어 같이 여겨졌었다. 하지만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미리 제자들에게 알려주시고 준비시키셨음을 늘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나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 날 것이다.(마르코 9,31 8,31 10,34 루카 9,22 18,33 24,46)”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맞이하실 죽음을 알고 계셨지만 되살아나실 것을 믿고 계셨다.
연중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며 ‘종말’을 통한 죽음과 되살아남의 묵상은 언제나 나무의 지혜로움을 부러워함으로 귀결되곤 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요긴한 선물인 나무는 늘 인간 곁에서 함께 살아오며 인간을 살려주고 먹여주며 품어주고 지혜를 가르쳐 줬다. 특히 요즈음 겨울을 준비하는 늦가을 나무들은 있는 힘을 다해 나뭇가지의 수분을 방출하며 단풍을 물들이고 낙엽을 떠나보내며 계절에 물들다 못해 훨훨 타올랐다.
나무들은 용을 쓰며 힘겨운 죽음과 이별을 준비하는데 인간은 그 모습을 보고 탄성을 올리며 ‘아름답다’ 한다.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 나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봄이 오면 나무는 잠에서 깨어나 생명수를 힘껏 끌어올려 죽어있는 메마른 가지를 부드럽게 만들고 온힘을 다해 잎사귀를 피워내면, 인간은 또 그 모습을 보고 탄복하며 아름답다고 한다.
인간은 언제 생명으로 가득한 연둣빛 나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무가 아름답게 변모될 수 있는 이유는 때와 시간과 계절을 알아 온힘을 다해 삶의 방식을 바꾸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할까? 인간은 뿌리가 없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노동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해서 그런지 그 때를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히려 때를 알지 못하고 내어주고 버려야 할 때 오히려 그 반대의 행동을 하기 때문에 더욱 추해진다.
예수님 말씀을 따라 인간은 늘 깨어 준비하지 않으면 ‘당연히 죽는다’는 진리의 보편성에 매몰되어 늘 망각하며 살아간다. 당신은 죽지 않으리라는 거짓말 보다 무서운 건 나는 죽지 않으리라는 어리석음과 망각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감이요 새로 태어남이니, 매일 긴장과 두려움 속에 사는 인간이 아니라 임산부처럼 아기라는 새 생명을 선물 받기 위한 설렘 속에서 준비를 할 수 있다면 죽음과 함께 살아감은 축복이요 선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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