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이윤일 요한의 묘. 1867년 병인박해에 순교 후 대구에 묻혔다가 성인의 가족들에 의해 용인시 처인구 깊은 산속으로 옮겨져 80여 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80여 년 간 이윤일 성인이 묻혀있던 묘소.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한 성 이윤일 요한은 대구대교구가 제2주보성인으로 현양하는 성인이다. 언뜻 교구 역사와는 관련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은 80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교구 땅에 잠들어 있었다. 이번 호에선 교구 땅에 자리한 이윤일 성인의 묘(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 산 32-1)를 찾았다.
용인대리구 천리요셉성당에서 국도를 따라 동남쪽으로 2㎞ 가량 이동하면 왼편에 ‘성 이윤일 요한 묘’라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남은 거리 580m. 더 이상은 차량으로 통행할 수 없는 산길이다.
갈림길마다 표지석이 친절하게 이윤일 성인의 묘역을 안내했지만,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새 숨도 차오른다. 성인의 묘가 가까워 올수록 더 가파른 산길이 나타났다. 혹여 성인의 묘가 보일까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곧고 길게 하늘로 치솟은 나무들이 보인다. 꼭 성인의 기개 같다.
성인은 1867년 병인박해 때에 순교했다. 그는 마을을 습격한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가 누구냐고 묻자 태연하게 “내가 바로 천주교 신자요”라고 답해 문경관아에 끌려갔다.
2개월 동안 수차례 심한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성인은 도리어 기도와 묵상을 더욱 열심히 하면서 함께 갇힌 교우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가파른 산길을 기도와 함께 올라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가장 경사가 급한 길이 나타났다. 지지대 없이는 쉽게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길이었다. 그리고 경사에 설치된 지지대에 붙어있는 기도문이 눈에 들어왔다.
‘골고타 언덕길 십자가길 십자가 바라보며 오르옵니다…’
이윤일 성인을 떠올리게 하는 기도문을 한 구절, 한 구절 읊다보니 어느새 오르막길의 끝이 보였다.
오르막이 끝난 길가에는 연이어 무덤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곳 신자들의 무덤인 듯하다. 이곳은 박해시대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이 있던 자리다. ‘먹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교우촌은 담배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먹방이 교우촌의 신자들이 신앙을 이어온 덕분에 이윤일 성인의 묘도 지금까지 지켜질 수 있었다.
성인이 관덕정에서 순교하자 유해는 인근에 가매장됐다가 대구 날뫼(비산동)에 매장됐다. 하지만 1900년 대에 들어 경부선 철도가 착공되자 먹방이에 살던 성인의 가족들이 유해를 먹방이로 옮겼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먹방이에 성인이 묻혔다는 사실이 잊히고 ‘거꾸로 된 치명자의 묘’가 무덤 이름이 됐다. 유해를 안장할 당시 성인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시신을 거꾸로 묻었기 때문이다.
성인의 무덤이 다시 부각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다. 당시 신학생이던 최재용 신부(원로사목자)가 신학교 교수인 최석우 몬시뇰에게 무덤의 존재를 알리면서 교회에 알려졌다. 이후 연구를 통해 이윤일 성인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신자들의 묘를 뒤로 하고 조금 더 나아가니 잘 가꿔진 성인의 묘가 나타났다. 지금 이 묘에 성인의 유해는 없다. 유해는 1976년 미리내성지 묘역에 옮겨졌다가, 1986년 성인이 순교한 대구로 이장됐다.
성인은 지금처럼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겨울에 순교했다. 성인의 묘를 떠나면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장으로 떠나던 성인이 자녀들에게 한 말을 마음에 새겨본다.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꼭 나를 따라 오너라.”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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