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후 미국 구호 바탕으로 완공
이윤일 성인 묘 등 신앙 유산 보호 노력
▲ 용인대리구 천리요셉성당.
용인대리구 천리요셉본당(주임 장찬헌 신부)은 박해시대부터 신앙의 명맥을 묵묵히 이어오고 있다.
용인 천리 일대는 박해시기에 많은 신자들이 모여 여러 교우촌을 형성한 지역이다.
본당 관할 내 한덕골은 1827년 정해박해 때 성 김대건 신부의 가족들이 피신해 온 곳이다. 김 신부의 가족들은 솔뫼를 떠나 한덕골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나무에 칡을 엮고 억새풀을 덮은 초막에 기거했다는 구전이 내려오고 있다.
이 한덕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의 큰아버지인 최영겸(베드로)의 일가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부모인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복녀가 박해로 순교한 후 최양업의 동생 최신정이 이곳에서 성장했다. 최양업 신부는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이후에도 한덕골에 들러 성사를 주곤 했다.
또 인근에는 신자들이 담배농사를 짓던 먹방이 교우촌도 자리하고 있다. 먹방이 교우촌은 이윤일 성인의 가족이 살던 곳으로 성인의 유해는 80년 가까이 교우촌 뒷산에 묻혀 있었다.
이밖에도 병목골, 검은쟁이, 서리 사리티 등 박해시대부터 이어온 여러 교우촌들이 자리한다.
이런 신앙의 명맥을 이어온 천리 지역에는 1890년대부터 본당 설립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미리내본당 초대주임인 강도영 신부는 1896년 미리내에 성당을 짓기 전에 천리에 성당을 짓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세도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다.
일대에 많은 교우들이 살고 있었지만, 빈곤한 경제 사정으로 오랜 기간 공소 건물조차 세울 수 없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한국교회를 위해 미국 신자들이 구호물자를 보내주자 신자들은 이를 저축해 성당 건축기금으로 삼았고, 이런 사정을 안 독지가도 도움을 줬다.
성당 건축이 시작되자 본당신자들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 신자들도 도와 1957년 8월 성당 건물을 준공할 수 있었다. 이어 1960년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는 기쁨을 맞았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 1964년 2대 주임신부의 전임 후 본당은 다시 용인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됐다. 비록 공소로 돌아갔지만 신앙의 명맥은 꾸준히 이어졌다. 공동체는 신앙을 전수해 나가면서 교구 사제를 3명이나 냈고, 여러 수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공소가 된 지 33년이 되던 1997년, 공동체는 다시 사제를 맞이하게 됐다. 2000년에는 새 성당도 봉헌했다. 신자들이 땀 흘려 세운 옛 성당은 교리실로 활용 중이다. 승격 이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본당 공동체는 한덕골 사적지와 이윤일 성인의 묘를 보존하면서, 선조에게 물려받은 신앙을 꾸준히 전해나가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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