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6일. 가족 휴가 차 경기도 가평을 방문한 김에 주변 성지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춘천교구 죽림동주교좌성당으로 가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곰실공소를 찾았다. 공소를 가기 전에 먼저 관할 거두리성당으로 가서 지리편을 알아보고는 곰실공소로 향했다. 전형적인 시골 풍경의 마을을 지나니 곰실공소가 보였다. 곰실공소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먼저 공소성당에 들어가서는 기도를 바쳤다. 우리 가족이 순례하는 성지에서 많은 것들을 느끼고 순교자들의 영성을 본받게 해달라고 기도드렸다. 아담한 성지의 작은 성당에서 바치는 기도는 저절로 그 옛날 이런 공소에서 기도를 바쳤을 듯한 선조들의 신앙이 느껴졌다.
춘천시 동내면 고은리는 일찍이 곰실로 불리던 곳으로 곰실공소는 엄주언 마르티노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자발적인 신심과 열정으로 스스로 신앙 교리를 찾아 그 가르침대로 살았는데, 곰실공소는 그로인해 세워진 신앙 공동체로 춘천 최초의 공소이며 춘천교구가 설립될 때 그 모체가 된 공소이다.
우연히 접한 ‘천주실의’와 ‘주교요지’에 감명을 받은 엄주언은 온 가족과 함께 천진암으로 가서 3년간 교리를 공부하고 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곧 춘천 서면 월승리로 돌아와 전교를 하다 주민의 배척을 받는다. 1910년경 곰실 윗 버무랭이로 이주한 엄주언은 교세의 확장에 따라 아랫 너부랭이로 옮겨 지금의 곰실공소를 세웠다. 신자 수가 300여 명에 이르게 되자 1920년에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1920년 9월에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928년 5월 지금의 죽림동주교좌성당으로 이전하여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현재의 곰실공소는 거두리본당 관할이며, 또한 곰실공소는 춘천교구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많은 순례자들이 신앙 선조의 모범을 따르고자 이곳을 찾고 있다.
곰실공소를 들른 다음 우리 가족은 죽림동주교좌성당을 갔다. 나지막한 언덕에 세워져 있는 죽림동주교좌성당에서 바라본 석양은 아름답다 못해 한 편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사를 드리기 전에 성당 뒤편에 마련된 외국인 사제들의 묘소를 찾아서 기도드렸다. 낯선 타국에서 공산당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겪어내야만 했던 외국인 사제들의 영성에 한참 동안 머물며 기도하였다. 그리고는 우리 가족 모두는 고해성사를 보고는 전대사를 얻기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다. 미사 중에 우리 가족이 모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시간은 너무 좋았고 은혜로웠다.
죽림동주교좌성당은 춘천 지역 최초의 공소라고 할 수 있는 곰실공소가 이전하여 자리를 잡은 곳으로, 곰실에서의 전교가 국지적이고 한정적이었다면 죽림동에서 사목 활동은 춘천의 전 지역을 공동체로 하는 본격적인 전교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하겠다.
1949년에 신축 기공식을 갖고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가 6·25로 인하여 대파된 죽림동주교좌성당은 1953년 전란 중에도 대부분 복구가 완료되었고, 1955년 춘천이 대목구로 승격되면서 1956년 예수성심대축일에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죽림동주교좌성당은 소양로성당을 분가하는 것을 시작으로 많은 성당을 분할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림동주교좌성당 뒤에는 성직자 묘지가 있다. 이는 춘천 지방의 천주교 전래와 정착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른 지방처럼 피로 얼룩진 박해의 고난은 없었지만, 6·25 공산당에 의해 성직자와 신자들을 잃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외국인 성직자들은 낯선 땅 타국의 전쟁 포하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다가 끝내는 공산군에 의해 끌려가 피살, 주검이 되어 교우들의 품으로 돌아와 성직자 묘지에 고이 쉬고 있다.
“주님, 유난히 더운 날에 순교자들의 영성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자 이렇게 가족이 성지를 찾았으니, 당신 품에서 평화로운 안식을 누리고 있는 순교자들의 영성을 본받아 저희 가족들도 주님을 향한 영적 여정의 순례자가 되게 하소서.”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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