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3일. 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아들 바오로와 이번에는 대전교구 성지를 순례해 보기를 하였다. 그래서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인 생가 터의 솔뫼성지를 먼저 찾았다. 솔뫼성지는 1998년 충청남도 문화재 제 146호로 지정되었다.
솔뫼성지로 들어서니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웃으며 반겨주었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014년 한국 순교자 시복 기념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솔뫼성지를 찾은 기념으로 세워진 모형이었다.
대전교구는 2007년도에 솔뫼성지를 ‘사제들의 성소와 성화’ 성지로 지정했는데, 또한 솔뫼성지는 가족의 신앙과 구원을 위해 특별히 순교자들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하는 성지이기에 대형십자가 앞에서 아들 바오로를 주님께 봉헌하는 기도를 바치기도 했다.
아들 바오로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는 전대사를 얻기위한 미사를 봉헌하였다. 미사 시간에 수녀님께서 독서를 하라고 해서 얼떨결에 독서도 하고 참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솔뫼성지는 ‘성지 설정 시기’(1906-1946년)와 ‘성지순례신심 정착시기’(1976-2005년)를 거쳐 ‘문화복음화 시기’를 맞고 있다. 또한 김대건 신부 기념관은 조선이 근대 국가로 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천주교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를 새로 평가하면서 그 뜻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2005년에 건립되었다.
또한 솔뫼 피정의 집이 헐리고 그 자리에 야외 공연장인 ‘솔뫼아레나’가 새로 지어져 2011년 5월 14일에 축복식이 봉헌됐으며, 순례자들을 위한 야외 미사와 다양한 문화공연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음은 한국천주교회에서 사제와 수도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성소의 요람(사제 32명, 수사 5명, 수녀 70여 명)인 합덕성당으로 향했다. 합덕성당은 성소의 요람지답게 참된 목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충청도 내포평야에 복음을 밝힌지 120년이 넘은 한국 천주교의 산증인이며, 참된 신앙을 보여주는 성당이라 그런지 웅장하고 유럽풍이라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성당 내부도 감동이었고, 성소의 요람 성당이라 가슴깊이 와 닿는 기도를 바쳤다.
“오! 주님, 당신 아들 바오로를 봉헌합니다. 당신의 뜻이 아들 바오로를 통해 이루어지소서!” 라고 기도하니, 평신도 순교자의 목자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6·25 전쟁 당시 피난의 권유를 물리치고 순교의 길을 걸었던 ‘백 비리버 신부’, 그리고 백신부와 함께 순교의 길에 동참한 윤복수 라이문도 회장과 송상원 요한 복사, 장티푸스 환자에게 병자성사를 주시고 같은 병에 걸려 선종한 심재덕 마르코 신부 등 이분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라 참된 신앙의 의미를 느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다음은 가장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인 ‘신리성지’를 찾았다. 성지에 도착하니 성당 공사 중이라 어수선했지만 성지 들어가는 입구가 참 아름다웠다. 수련꽃이 연못에서 활짝 꽃을 피우고 반겨주었다. 32명의 머리 없는 무명 순교자들을 기리는 곳이라 그런지 아름답게 피어난 수련꽃이 그분들의 머리로 보였다. 비록 신앙을 증거하다가 머리는 잘려 없어졌지만 신앙의 꽃으로 피어난 머리는 아름다운 수련꽃으로 피어나 순례자들에게 많은 귀감을 주는 것 같았다.
신리성지는 성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이자 성 디블뤼 안 주교의 주교관이(교구청)이 자리하고 있다. 안 주교는 1866년 병인년에 위앵 민 신부와 오메트르 오 신부 그리고 황석두 루카와 함께 이곳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순교하였는데, 안 주교는 이 집에서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그리고 병오박해 당시 순교한 이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한국 가톨릭 교회사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또한 손자선은 관장 앞에서 자신의 살을 물어뜯어 신앙의 증거로 보인 치명자로도 유명하다. 문헌에 기록된 신리- 거더리 출신 순교자만도 4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여다.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머리없이 발견된 무명 순교자의 묘와 손자선의 가족 순교자 묘 14기 등 40여 기의 순교자 묘가 있다.
마지막으로 순교로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원머리(신평) 출신 열아홉 분 순교자들의 기록이 담긴 원머리 순교지를 순례하였다. 열아홉분 순교자들의 기록은 ‘치명일기’와 ‘치명사적’에 “원머리에 얼마나 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던가를 알 수 있으며, 순교자들의 신심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고 남아있다.
원머리 순교지에 도착하니, 1868년 박선진 마르코와 함께 순교한 박태진 마티아의 묘가 현양비와 함께 재정비되어 있었다. 박 마티아와 박 마르코 사촌 형제가 같이 순교하여 순교자 묘지에 나란히 세워진 현양비와 묘소를 보면서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이 너무 강하게 다가와서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하신 분들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그 당시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이 현대에도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며 안산으로 돌아왔다. 성지를 순례할 때마다 순교자들의 영성에 놀랍고 감탄하게 된다.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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