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매서운 한파가 온 날, 바닷가 성지 말고 다른 성지를 갈까 했는데, 아들 바오로가 바닷가 인근 성지에 가자고 해서 대전교구 ‘갈매못 순교성지’를 찾았다.
추운 날 바닷가 성지라 더 추웠지만 아들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십자가의 길을 봉헌했다.
내가 손도 시리고 너무 춥고 해서 주모송을 빠뜨리고 십자가의 길을 바치는데, 아들 바오로가 “엄마, 옆에 수녀님들을 따라잡겠어요.”라고 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아까부터 추운데도 수녀님 두 분이서 너무 진지하게 십자가의 길을 바치는데, 난 춥다고 주모송도 빼고 바쳤으니 아들 보기가 민망했다. 아들 바오로가 많이 변화되어가고 있음에 감사한 날이다. 다른 날 같으면 ‘십자가의 길을 왜 바치는가?’라고 따지고,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의 길 안 바치는데 우리만 봉헌한다.’며 투덜거렸는데, 지난 번 공세리성당에서 십자가의 길을 바치면서 하느님 체험을 했는지 먼저 십자가의 길을 바치자고 하고 추운데도 아무 말 없이 진지하게 십자가의 길을 바치는 바오로를 보면서 가랑비에 옷이 젖듯 아들 바오로의 마음에 하느님이 가득 자리 잡아 가고 있음을 느꼈다.
갈매못 순교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성 다블뤼 안 주교, 성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신부, 성 황석두 루카, 성 장주기 요셉과 다섯 유명 순교자, 그리고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처참히 순교하신 곳으로, 한국 교회의 순교사를 생생하게 증거하는 곳이다.
다블뤼 주교는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한 뒤 주변에서 사목 활동을 하시는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에게 자수를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고 붙잡힌다. 이어 편지를 받은 두 분도 자진해서 잡히시어 서울로 압송되는데, 이때 황석두 루카도 압송되는 주교님께 간청하여 함께 압송되었고 장주기 요셉도 함께 처형당하길 요청하여 다섯 성인이 이곳 갈매못에서 처형되었다.
다섯 성인의 잘린 머리가 장깃대에 매달릴 때에 은빛 무지개 다섯 개가 내려와 다섯 성인의 얼굴을 비추었다고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은 전하고 있다. 갈매못은 ‘갈마연’에서 온 말로 이곳 성지의 형세가 ‘갈증을 느끼는 말이 목을 축이는 연못’의 형세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십자가의 길을 바친 후, 무명 순교자 사형 터에서 ‘무명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면서 아들 바오로가 주님의 뜻을 따라 잘 걸어가기를 청하는 기도도 바쳤다. 그리고 전대사를 얻기 위한 미사를 드렸다. 1시간 동안 순교자들에 대한 강론 말씀으로 채워주는 은혜를 주셨다. 순교자들에 대한 강론을 들으면서 내 삶을 참 많이 반성했다. 그리고 하느님 때문에 목숨을 내놓은 그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아들 바오로도 신부님의 순교자들의 영성에 대한 말씀을 듣고는 많은 것을 얻었으리라 생각했다. 미사 후에 신부님께서 제대 커튼을 열어젖히자 푸른 바다가 보였다. 바다를 바라보니 신부님께서 강론 때 ‘순교자들의 시신이 바다에 둥둥 떠다녔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바다가 너무 슬퍼 보였다. 그리곤 거룩해 보였다. 그 옛날 박해로 순교한 그분들의 영성이 느껴져서 마음이 겸허해졌다.
하느님께서 바오로에게 꼭 필요한 협조자를 보내주셨다. 성지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줄을 서 있는데 전주교구 가톨릭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계시다 얼마전에 정년퇴임하시고 성지순례 중이신 부부를 만났다. 나중에 전주교구로 성지 순례 오면 성지안내 해주신다고 꼭 연락하라고 하시곤 커피를 마시면서 많은 대화도 나누었다. 하느님께서 미리 예비하시고 우리와 만나도록 준비하셨다는 걸 느끼는 순간 눈물이 났고 하느님께 너무 감사했다.
다음으로 청양 다락골성지를 찾았다. 청양 다락골성지를 찾아가는 시간동안 하느님께 너무 감사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입에서는 찬미가가 흘러나왔다. 아들 바오로도 내가 기분이 좋아보였는지 자기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들 바오로와 성지순례길이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란 걸 느끼고 감사하고 또 협조자를 보내주신 하느님께 너무 감사했다.
청양 다락골성지에 도착하여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서 성체조배를 하였다. 조배 시간 동안 하느님께 감사드리고는 최양업 신부의 행적을 전시해 놓은 곳에서 감상하고 무명 순교자를 위한 기도소에서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아들 바오로를 위한 기도도 드렸다. 성당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아담한 성지가 참 아름다웠다. 아들 바오로와 줄 무덤가로 향했다. 줄 무덤으로 올라가는 길에 조성된 돌무덤 십자가가 특이했다. 커다란 항아리에 십자가의 길은 산길로 조성되어 있었다. 한참을 산길을 올라가니 줄 무덤이 있었다. 그곳에서 순교자를 위한 기도를 바쳤다.
청양 다락골의 천주교 전파는 신해박해(1791년)를 피해 서울에 살던 최인주(최양업 신부의 조부)와 그의 모친(내포의 사도 이존창 누이)이 고향인 이곳에 피신해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이곳에서 최양업 토마스(1821년) 신부와 그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년) 성인이 탄생하게 된다. 또한 기해박해(1839년) 때, 모방 나 신부와 샤스탕 정 신부가 마지막으로 피신해 숨어 지내며 천주교를 전파하다 앵베르 범 주교님의 편지를 받고 홍성 관아에 자진 자수함으로써 조선 교회 교우들을 위해 착한 목자로서 순교를 받아들인 곳이다. 그 결과 그동안 경주 최 씨의 집성촌이었던 이곳은 거룩한 천주교인들의 교우촌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러나 병인박해(1866년)때, 이 교우촌이 발각되어 잡혀간 교우들은 홍주(홍성)와 공주 관아에서 하느님을 모른다는 한 마디를 못해 치명을 당하게 된다. 그나마 살아남은 교우와 친척들이 그 시체들을 몰래 훔쳐와 다락골에 있는 자신들의 종친 묘 한쪽에 가족묘로 황급히 줄을 지어 매장(줄 무덤)하게 된다. 현재 무명 순교자, 증거자의 묘소 37기(1줄 무덤 14기, 2줄 무덤 10기, 3줄 무덤 13기)와 최양업, 최경환 성인의 탄생지이자 생가터가 위치한 새 터가 보존되어 있다.
갈매못 순교성지와 청양 다락골성지 두 곳을 돌아보고 집으로 오는 내내 행복감으로 충만했다. 아들 바오로와 이렇게 행복한 순교자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음에 감사함과 행복으로 다가왔다.
“사랑하는 주님, 이렇게 아들 바오로와 좋은 시간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와 찬미, 영광을 드립니다. 주님은 저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옵소서!”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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