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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성 장주기(요셉)

작성자 : 홍보전산실 작성일 : 2017-01-01 조회수 : 1079

20여 년 회장직 수행… 선교사 그림자 역할 자처

1803년 수원 양간(요당리) 태생
집안 식구 모두 세례 받도록 도와

박해 피해 배론 골짜기에 정착
성요셉 신학교 건립에 자택 봉헌
신학교 관리직 소임도 맡아


   장주기(요셉) 성인은 회장으로서 교회에 헌신하고, 1855년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될 때 공헌한 인물이다.


   성인은 1803년 수원 양간(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느지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1827년 경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평소 쌓아온 두터운 학식과 덕망을 바탕으로 천주교를 반대하던 집안 식구들을 오히려 감화시켜, 모든 집안 식구가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이끌었다. 특히 열렬한 선교로 그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을 신심 깊은 교우촌으로 변모시켰다. 또 이곳 요당리 교우촌이, 전답을 일궈 교회의 재정을 지원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했다.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는 학식뿐 아니라 신심이 두터웠던 성인을 회장으로 임명했다. 이후 성인은 20여 년간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박해 속에서도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신앙을 굳게 지켜갔다.


   성인은 박해를 피해 4차례에 걸쳐 산 속으로 피신하면서 생활했다. 1845년에는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 골짜기에 집을 짓고 정착해 회장직을 이어갔다. 1856년 베르뇌 주교가 배론에 신학교를 세우자 성인은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봉헌하고 스스로 신학교 관리직을 맡았다. 그는 신학교 살림을 도맡아하면서 신학생들을 뒷바라지하고 농사를 지어 수확물을 신학교에 봉헌했다.


   극심한 박해가 이어지는 시기였지만, 성인의 신중하고도 솜씨있는 운영으로 신학교는 11년 동안이나 유지됐다. 또 인근 교우촌에도 도움을 주고, 선교사가 다니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보필했다. 그의 삶은 마치 수도자와 같았다고 한다.


   성인은 1866년 3월 1일 포졸들이 배론에 들이닥치면서 체포됐다. 하지만 성인의 공을 잘 알고 있던 푸르티에 신부가 관헌에게 돈을 주어 성인을 석방시켰다. 성인은 순교를 각오했지만, 푸르티에 신부의 말에 순명해 울면서 배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5일 뒤 식량을 장만하기 위해 노루골의 신자 집을 찾아간 성인은 다시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체포된 성인은 다른 신자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해 자신이 선교사들의 집주인이라면서 신앙 증언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서울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켰고, 충남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늘 자녀들에게 “순교해 예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던 그의 염원이 이뤄지던 순간이었다.


■ 성인의 발자취 만날 수 있는 성지




요당리성지(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길 155)는 장주기 성인이 태어나고 신앙을 키워간 터전이다. 성지에는 성인의 묘역과 성당,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의 길 등이 조성돼 있다.
※문의 031-353-9611 요당리성지, www.yodangshrine.kr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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