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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아들 바오로와 함께 하는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20

작성자 : 홍보전산실 작성일 : 2017-02-21 조회수 : 1134



  2월 16일. 아들 바오로가 서울에서 저녁에 친구들이랑 만나기로 약속도 되어있고 해서 서울교구 성지순례를 하기로 하고 아침에 서울로 가는 전철을 탔다.


   이날은 아들 바오로와 ‘서울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성당, 광희문성지, 서소문 순교성지(기념성당 중림동 약현성당 )’를 순례하기로 하였다. 한동안 하지 못했던 한국천주교 성지순례를 다시하게 되어 너무 기뻤다.


   먼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명동역에 도착하여 아들 바오로랑 명동 길을 걸어 명동성당을 가면서 아들한테 물었더니, 명동성당엔 친구들과 몇 번 와 보았다고 한다. 나도 사실은 자주 찾았던 곳이다. 명동성당은 올 때마다 나를 설레게하는 곳이다.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에 들어갔더니, 성당 안은 초등학교 졸업식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아 북적거렸다.


   문득, 지난 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식 날이 생각나면서 그분이 그리워졌다. 그날은 엄청 많은 사람들이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위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줄을 서서 기다렸으며, 사람들은 하나같이 슬픔에 젖어있었다. 나도 엄청 울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은 한국 교회 신앙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고 또한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후 이승훈, 정약전 3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다. 1898년 5월 성령강림 대축일에 뮈텔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하면서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믿음을 지킨 순교자의 유해를 받아 지하 성당에 모셨고, 현재 지하 묘역에는 성 앵베르범 주교와 성 샤스탕 정 신부, 성 모방 나 신부의 유해 일부 및 김성우 안토니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등 다섯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으며, 푸르티에 신부 및 프티니콜라 신부의 유해와 기해박해의 무명 순교자 두 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다음으론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과 신학교를 방문하였다. 아들과 찾은 신학교는 17년 전 내가 교리신학원을 다닐 때와는 많이 변해 있었다.


   ‘이 한 젊음 불태우리다. 하느님을 위해서~’ 란 ‘교가’ 문구를 보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으며,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성당에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아들 바오로가 오늘 이곳과 성지에서 아주 특별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 기도를 들었는지 성당에서 기도 후 나와 아들 바오로랑 거닐고 있는데, 신학교 담당으로 이틀 전에 오셨다는 김범열 신부님을 만나는 행운을 주셨다.


   김범열 신부님은 신학교 한 바퀴를 돌며 신학교 곳곳을 소개해 주시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신부님께 너무 감사함을 느낀 하루였다. 물론 내 기도를 들어주신 하느님께도 감사의 기도를 바쳤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머물렀던 사제관 그 뒤 산책로를 걸으면서 그분의 체취를 느꼈고 감동이 밀려왔다. 아들 바오로도 너무 좋다며 감탄하였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당에는 우리나라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오늘도 그를 본받아 이 땅의 참된 목자가 되려는 신학도들의 모든 삶에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효시는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선교사들은 정하상을 비롯한 소년들에게 국내에서 신학 교육을 시키는 한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중 김대건과 최양업만이 사제품을 받고 귀국해 활동하다가 순교했던 것이다. 그 후 1855양 배론에 성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신학교육을 시작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폐쇄되었고 1885년 강원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부엉골)에서 현 가톨릭 신학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예수성심신학교가 문을 염으로써 최초의 국내 신학교의 설립을 보게 된다. 그리고 2년 뒤인 1887년에 신학교는 서울 용산 함벽정(현 원효로 4가)으로 이전한다. 1942년 용산 예수성심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가 1945년 경성 천주공교 신학교 개칭, 다시 설립되고 그 후 성심대학이라는 명칭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


   다음으로 서울 성곽의 광희문 성지를 찾았다. 그 많은 순교자의 시체들이 짐승들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 광희문으로 나갔다고 하는 순교지를 아들과 함께 방문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생각하니 맘이 착잡하고 서글펐다. 그래서 아들 바오로랑 잠시 그분들의 순교정신을 생각하며 묵념하고 기도했다.


   광희문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홍화문, 광희문, 소덕문, 창의문으로 사대문 사이에 세웠던 문을 말함.) 중에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으로 장춘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다. 본래 수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해 내던 곳으로 송장 또는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이라고도 불렀다.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이 도성 안으로 끌려 들어왔고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으니 실로 생과 사의 갈림길이었다.



   마지막 순교성지로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를 시복하시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던 서소문 순교지를 찾았다. 이때 서소문에서 순교하신 신유박해 순교자 25위와 1819년 순교자 2위가 복자로 선포되었다. 서소문 순교 성지는 서소문 공원 전체가 공사 중이라 아들 바오로랑 멀리서 바라보았고 아쉽게 발걸음을 옮겨 서소문 성지 기념성당 중림동 약현 성당으로 향했다. 서소문 성지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교회 건축물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사적 제 252호) 그곳에 전시된 박해자들의 생활모습들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서소문 성지는 조선 시대 공식 사형 집행장으로,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의 가르침과 최종 사형 판결을 내리는 형조나 의금부와 그리 멀지 않다는 편의성,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칠패시장’이 있어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조선 시대 대부분의 처형이 이루어진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이 처형장에서 순교하신 분은 신원이 확인된 분만도 100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44위가 시성되었는데 단일 순교지로는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정하상 바오로와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녜스 성인 들이 있다.


   한국 교회는 현재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순교자의 시복을 추진 중에 있다. ‘하느님의 종’ 133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와, 신유박해 때 ‘백서’를 작성한 황사영 알렉시오를 비롯하여 서소문 순교자 6위가 포함되어 있다.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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