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추석 전 긴 연휴를 이용해 강원도로 ‘가족 성지순례’를 계획하고 강원도 거진 우체국 수련원을 향해 9월 31일 오후에 출발하였다. 그리고 10월 1일 교중미사를 거진 성당에서 다함께 봉헌하였다. 시골 성당이라 인심이 후했다. 한 신자가 기증하였다는 인절미와 차를 맛나게 먹고는 근처 양양 성당 성지로 출발하였다.
양양 성당에 들어서니, 전대사 성당이란 문구와 희년 마크가 동상으로 제작되어 눈에 들어왔다. 박해시절 옹기골에서 시작된 신앙 역사와 이광재(디모테오) 신부의 순교혼이 잘 보존돼 있어 동해안을 찾는 피서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성당이었다.
시골 마을의 언덕배기에 서 있는 성당에 들어서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 마당을 서성거리는 우리 가족을 향해 순박한 아저씨 모습의 본당 회장님이 다가와 성당을 소개해주었고 가족사진도 찍어주셨다. 시골의 순박한 정이 느껴졌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순교자 이광재(디모테오) 신부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교각이 있었다. 기념비에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38선에서 가장 가까운 성당으로 38선을 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던 양양 본당 3대 주임이었던 이광재 신부는 함흥교구와 연길에 있던 수녀원의 폐쇄로 피난하는 수녀들과 덕원 신학교의 신학생, 신부들과 많은 신자들이 38선을 넘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이광재 신부는 소련군이 골롬반 선교회 신부들을 추방함으로써 비어있던 북쪽 성당의 양떼를 돌보기 위해 평강, 원산까지 사목 활동을 하였는데, 1950년 북한 교회의 신자들을 향해 떠났다 돌아오지 못했고 인민군에게 처형당했다.
1914년 싸리재 남쪽의 옹기점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교우들이 모여 교우촌을 만들었는데, 도문 공소 또는 싸리재 공소라고 하는 이곳은 영동 지역 최초의 공소이며, 이 공소를 전신으로 하여 만들어진 곳이 양양 성당이라고 했다.
다음날 우리 가족은 강릉부 관아를 찾았다. 비가 오는 가운데 찾은 관아에는 한지공예 전시용품을 비닐을 씌우는 사람만 보였다. 관아의 수령 집무실인 칠사당에서 병인박해 때 심문도 없이 목이 잘리는 참수형으로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다는 곳에서 잠시 묵념하고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에 체포되어 온 천주교인들을 묶어 갖은 고문을 가하며 심문했던 것으로 전하는 고목이 마당 한가운데에 아직도 푸름을 간직한 채 역사를 말해주고 있어서 서글펐다. 도장을 받는 곳을 찾다가 못 찾고는 비가 많이 내리고 또 들려야 하는 성지가 있어서 금광리 공소로 향했다.
금광리 공소는 관아에서 머지않은 곳에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가운데 찾은 공소는 시골 마당에 세워진 사랑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먼저 마당 한쪽에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성모동산 앞에서 우리 가족과 북한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성당 공소에 들어가니 편안함이 느껴졌다. 예수님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 성체조배를 하였다. 비가 많이 오는데 방금 다녀가신 두 분이 서명란에 서명하시고 봉헌바구니에 예물 봉투를 넣으셔서, 우리 가족도 예물봉투에 가족 지향을 적고 봉헌 바구니에 넣었다.
금광리 공소는 1887년에 설립되어 영동 지역 천주교의 모태와 같은 곳으로,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적극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계기는 1866년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던 한국 교회사의 4대 박해 가운데 하나였던 병인박해라고 할 수 있다. 박해를 피해 정착하여 오랫동안 신앙을 지켜가는 이들이 있는 이곳은 그동안 국내의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잡초처럼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이다.
다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면서 원주교구 풍수원 성당, 성지에 들렀다. 성당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성당 신자들이 직접 재배한 농산물들을 무인 판매하고 있었다. 성당으로 오르막길을 오르니 1988년 설립되어 1909년에 낙성식을 가진 건물로서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고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었다.
이 성당은 신자들이 직접 벽돌을 굽고 아름드리 나무를 해 오는 등 건축 소재를 스스로 조달하여서 그 영성은 오늘날의 신자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1982년에 강원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역사적 유물이다. 박해를 피해 피난처를 찾던 이들 중 신태보는 강원도 횡성군의 풍수원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형성하고 강원도 최초의 본당 설립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그리곤 박해로 고향을 떠난 많은 교우들을 불러 모아 큰 촌락을 이루고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1888년까지 약 80여 년 동안을 목자 없이 오직 평신도들로만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믿음을 지켜 온 곳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은 성모동산 앞에서 기도를 바치고, 언덕길을 오르며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십자가의 길 끝에 있는 세 번째로 한국인 신부로 서품된 그리고 풍수원 성당을 건립한 정규한 아우스딩 신부의 묘소에서 참배하였다. 고행의 언덕을 오르며 십자가의 길을 바치면서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무참하게 죽어갔던 우리 신앙선조들의 순교의 정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으며, 그런 신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성당을 건립하고 참된 목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신 선조 신부님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는 순례였다.
“사랑의 주님!
이렇게 우리 가족이 다함께
당신을 믿고 따르다 목숨을 바친
신앙선조들의 영성에 감복하며
일상으로 돌아가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땀의 순교를 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소서!”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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