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1일, 오늘은 아들 바오로랑 한국 천주교의 최초의 신학교가 있는 ‘배티성지’로 순례하기로 하였다. ‘배티’는 ‘배나무 고개’라는 뜻이다. 고개 여기저기에 돌배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배티성지에 도착하니, 아직 10시 20분, 미사가 시작되기 전 40분이었다. 미사에 늦지 않기 위해서 아침 일찍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이다. 대성전에 차를 세우려니, 오늘은 소성전에서 미사가 있다는 메모지가 보였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는 언덕배기로 소성전을 향해서 가는데 어떤 자매님께서 말을 걸어왔다. 아들과 함께 왔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들이 다 컸는데도 엄마 따라 성지를 다니는 게 참 착하다고 말하였다. 그 소리를 성지 올 때마다 신자들로부터 계속 들어왔다. 난 그동안 아들과 성지순례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는데, 신자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고 하느님께 감사기도가 나왔다.
소성전 앞에 서 계시는 성모님에게 아들 바오로랑 함께 가족을 위한 촛불 봉헌 기도를 하였다. 미사 때 신부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기도 마지막 문구에서처럼 악을 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론하셨다.
나는 아들 바오로와 내가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되는 나쁜 악습에서 헤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의지로서 아들 바오로와 내가 내부에서 비롯된 나쁜 악습을 끊어버리겠다고 결심하도록 힘과 용기를 달라고 청하였다.
성전을 나와 아들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야외 성전과 무명 순교자 6인의 묘지로 가는 언덕빼기에 난 길로 십자가의 길이 펼쳐져 있었다.
아들이 먼저 십자가의 길을 바치자고 하여서 난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십자가의 길을 바치자고 하면 투정부리면서 바쳤던 십자가의 길을 오늘은 아들 바오로가 먼저 바치자고 하여서 너무 감사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라고 아들과 부르는 노래가 천상의 노래로 들려왔다. 비록 등과 이마에는 땀이 맺히고 더웠지만, ‘아들 바오로가 하느님의 길을 가는데, 방해되는 장애물을 없애 달라.’는 지향으로 바치는 십자가의 길은 하느님과 함께 걷는 순례 길이었다. 또한 땀의 순교를 하신 최양업 사제의 순례 길에 함께 동참하는 기분이었다.
점심을 먹고는 무명 순교자 14인 묘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천주교인이라고 해서 무참히 순교를 해야만 했던 무명 순교자 14인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 아들 바오로랑 나도 순교자들의 영성을 본받아 이 세상에서 땀의 순교를 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는 기도를 바쳤다. 그리고는 배티 성지 대성전에서 잠시 성체조배를 하고는 성전 밖에 서 계신 매괴 성모님 앞에서 묵상기도 하면서 성모님의 일곱 구멍을 바라보았다. 아들 바오로는 아무 말없이 성모님의 일곱 구멍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이어서 배티성지 박물관에서 한국천주교의 발자취를 관람하였고 최양업 사제의 발자취를 걷는 시간과 동영상으로 최양업 사제가 죽기까지 걸어 다니면서 사목을 하였던 영상을 보면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최양업 사제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묵상 길을 지나니 최양업 사제에게 편지를 써서 봉헌하는 곳이 있었다. 이곳의 편지는 마지막 주 토요일에 하느님께로 봉헌되어진다고 하여서 아들 바오로가 최양업 사제의 영성을 본받아 하느님을 위한 삶으로 일생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기도와 하느님의 길을 걷는데 방해되는 장애물을 없애달라는 기도를 바치고 그 지향의 편지를 써서 봉헌하였다.
다음으론 최초의 신학교로 최양업 사제가 지냈던 곳으로 갔다. 성 안 다블뤼(안토니오) 주교는 아직 신부였을 때인 1850년에 고 페레올(요한) 주교님의 명에 따라 ‘한국 천주교 최초의 소신학교’를 설립하고, 배티 교우촌 안에 방 두 칸짜리 신학교(성당, 사제관 겸용)를 마련했다. 1853년 여름에는 다블뤼 신부님에 이어 최양업 신부님이 신학교를 맡았고, 그 이듬해 3월에는 세 명의 신학생이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나면서 신학교는 문을 닫았다. 폐교된 신학교는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했는데,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1854년 배티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로 삼고 전국 5개도를 순방했다고 하였다.
아들과 함께 ‘최초의 신학교’로 가는 103위 계단으로 오르면서 103위 순교자들의 영성을 느꼈다. 최초의 신학교는 초가지붕으로 된 방 두 칸의 초라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최초의 신학생들이 학습하였던 곳이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1849년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님은 차쿠 성당(현 랴오닝성 좡허시 롱화산진)에서 7개월 동안 다섯 개 도에 흩어져 사는 교우들을 순방하기 위해 ‘길에서 하느님을 만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용맹한 군사가 되려고 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결국 과로에 장티푸스로 쓰러지고 1861년 6월 15일, 만 40세에 돌아가셨다. 신부님은 1853년 여름부터 약 3년 동안 배티 교우촌을 활동 거점으로 삼고 미사를 집전하고, 신학생들을 지도하고, 글을 알지 못하는 교우들을 위해 한글 [천주가사]를 지어 널리 전하였다. 최초의 한글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와 한글 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도 번역하였다.
박명영 가타리나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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