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사(1761~1839)는 스무 살 무렵에 상처(喪妻)한 순교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후처로 들어갔습니다. 유소사는 남편의 권유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신유박해 때 남편을 비롯해 유소사, 정철상, 정하상, 정정혜 모든 가족이 체포되었습니다. 유소사는 남편과 정철상이 순교한 후에 풀려났지만, 재산은 모두 몰수되어 남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남편의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 마재마을로 왔습니다. 그러나 친척들은 그들을 멀리했습니다. 그래서 유소사는 어렵고 힘들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유소사의 꿈에 남편 정약종이 나타났습니다. 정약종은 “내가 천국에 방이 여덟 개 있는 집을 지었습니다. 다섯 개 방은 이미 다 찼고 이제 세 개 방만 남았습니다. 그러니 현세에서의 고생을 잘 참아내고 천국에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꿈은 맞았습니다. 여덟 식구 중에 이미 다섯 명은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세 명도 곧 순교합니다. 그 꿈은 힘든 상황 속에 있던 유소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아들 정하상은 조선으로 오는 성직자의 영입을 위해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습니다. 아들이 중국 북경을 오고 갈 때마다 유소사는 혹시나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조카가 유소사에게 시골로 내려와 살라며 집을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유소사는 “나는 늘 순교하기를 원했다. 이제 그 기회가 왔다. 아들 정하상과 함께 순교하려고 한다. 그러니 그곳으로 가지 않겠다.”라며 거절했습니다. 이렇듯 유소사는 순교할 각오를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유소사는 일흔아홉 살에 자식들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나라의 질서를 문란케 한 국사범이라 오랏줄에 묶였습니다. 오랏줄은 죄인을 묶을 때 쓰는 붉고 굵은 줄입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감옥에 있다가 법정에 나가 신문을 받았습니다.
(재판장)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것이 사실이냐?”
(유소사) “그렇소, 나는 천주교를 믿소.”
(재판장) “살려면 천주교를 배신하고 교인들을 대라.”
(유소사) “죽더라도 천주를 배반할 수 없소. 또한 교인들
이름도 댈 수 없소.”
유소사는 열두 번에 걸쳐 230대의 태장(볼기를 치는 형벌)을 맞았습니다. 여든 살이 다 된 노인을 230대나 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잔인하게 고문당했는데도 유소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유소사는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국법에 ‘노인에 대한 참수형’을 금지했기에 포도청에서는 매로 때려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유소사는 기운이 다하여 차가운 감옥 바닥에 누웠습니다. 그러곤 가만히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순교했습니다. 유소사는 예수님과 성모님이 자신을 안아주는 것을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