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광야 생활을 접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맨 처음 정복한 성읍은 바로 예리코입니다(여호 6장). 예리코는 “야자나무 성읍”(신명 34,3) 이라 할 정도로 물과 먹을거리가 풍부해 광야를 다닌 이들에게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리코에는 과객을 상대한 주막과 창녀가 많았고, 여호수아가 예리코 정복 전에 파견한 정탐꾼을 도와준 이도 창녀 라합입니다(여호 2장). 가나안 여인인 라합이 동족이 아닌 이스라엘을 도운 건, 비참한 창녀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한 노예 집단을 구해내 탈출시켰다는 소문을 듣고(여호 2,9-11) 자신도 해방을 꿈 꾼 것은 아닐까요?
창녀 라합의 도움으로 예리코가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될 때, 그 스토리도 해방의 해인 ‘희년’ 모티프로 서술되어 흥미롭습니다. 여호수아기 6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정복 전 계약 궤와 뿔 나팔을 앞세워 예리코 성을 하루에 한 번씩 돌고, 이레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 돕니다. 그런 다음 뿔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자 예리코 성이 무너지는 기적이 일어나, 그곳을 주님께 완전 봉헌물로 바치게 됩니다. 이때 분 뿔 나팔은 하느님 예배 때 자주 쓰인 악기로, 주님의 현존을 신호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기 6장의 뿔 나팔 [쇼파르]는 ‘숫양’을 뜻하는 히브리어 [요벨]이 함께 쓰인 형태입니다(4.6.8.13절). 요벨은 레위기 25장 9절에서 ‘희년’의 뜻으로 쓰인 단어입니다. [요벨]이 이렇게 뿔 나팔과 함께 쓰인 예는 탈출기 19장 13절의 “숫양 뿔 나팔”에도 존재하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상징성을 전달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직후 시나이산 아래 섰을 때 주님의 현현을 신호하며 ‘요벨’ 소리가 울려 퍼졌고, 백성이 주님의 약속대로 가나안을 차지하는 첫 과정에서도 ‘요벨’ 소리가 재차 울려 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기의 요벨 소리는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드디어 실현되었음을 신호하는 셈입니다.
또한, 희년이 일곱째 해인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낸 뒤 맞이하는 해이듯이(레위 25,8) 예리코 정복에도 같은 상징수가 반복됩니다. 사제들이 분 뿔 나팔의 수가 일곱이고, 백성이 다 같이 예리코 성을 돈 날수도 이레입니다. 이렛날에는 일곱 번 돕니다. 이런 특징은, 가나안의 첫 성읍인 예리코에서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위한 희년, 곧 ‘해방의 해’를 준비하셨음을 알려줍니다.
여호수아기 6장에서 말하려는 바는 이스라엘 집안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게 되는 첫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예리코에 울려 퍼진 뿔 나팔 소리는 희년의 요벨 소리처럼 이스라엘과 창녀 라합의 해방을 완전히 확정 짓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