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증이(1782~1839)는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열여섯 살에 남이관 성인과 결혼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친정아버지(조 프란치스코)가 순교하고 남편도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조증이는 친정이 있는 이천으로 내려가 10여 년을 냉담하며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친척 집에 머물렀는데, 그 친척의 훌륭한 신앙심을 본받아 냉담을 풀고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정하상의 사촌 누이였던 그녀는 정하상이 북경에서 성직자를 모셔올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유배에서 풀려난 남편은 중국인 유방제 신부의 입국을 도왔으며, 조증이는 남편과 함께 유 신부를 정성껏 보필했습니다. 유 신부가 중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작은 집을 마련해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를 모셨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집은 교우들이 모여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공소 역할을 했습니다. 조증이가 교우들에게 말했습니다. “박해가 일어나면 우리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천주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영혼을 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교우들은 조증이를 존경해 ‘살아있는 성녀’라고 불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조증이는 남편을 친정으로 피신시켰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다가 체포되었습니다. 포도청의 관원은 조증이에게 배교하고 남편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며 신문했습니다. 조증이는 “죽어도 천주를 배반할 수 없소. 또한 남편이 어디에 숨었는지 알지 못하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다섯 번이나 똑같은 신문을 받았습니다. 포도대장이 “이제 마지막으로 말한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 네가 죽을 것인지 아니면 천주를 배반하던지.”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조증이는 “천만 번 죽더라도 천주를 배반할 수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고문은 더 혹독해졌습니다. 주뢰를 틀고 곤장을 180대나 맞았습니다. 조증이의 온몸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고름이 흘러 더는 형벌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증이는 형조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곤장을 세 차례나 더 맞았습니다.
남편 남이관도 체포되었고, 지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동일동사(同日同死)는 못하더라도 동지동사(同地同死)는 하자.’라는 유언을 남기고 먼저 순교했습니다. 조증이에게도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교우들은 곧 사형당할 조증이를 에워싸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조증이는 오히려 교우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서울 서소문 밖에 있는 형장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