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련(1794~1839)은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순교자 현석문 성인의 누나로 어려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 현계흠이 순교했습니다. 열일곱 살에 순교자 최창현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불행하게도 3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기에 친정으로 돌아와 삯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현경련은 불행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께서는 더 가까이 그분을 섬기고 내 영혼을 구해주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라며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현경련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독서 후에는 꼭 묵상과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교리 지식은 남달랐습니다. 현경련은 여회장을 맡아 비신자들을 가르치고 교우 중에 교리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쉬는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권면했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대세를 주었습니다. 또한, 근심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아픈 사람들을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신부들이 순회할 때는 자기 집에 교우들을 모아놓고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앵베르 주교가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록한 『기해일기』를 맡아 보관하면서 순교자들을 계속해서 써나갔습니다. 이 기록은 후에 조선의 순교자들이 성인으로 시성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현경련도 고발되어 피신했으나 숨은 곳이 알려져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포졸들은 현경련의 동생 현석문이 샤스탕 신부의 충복인 것을 알고는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현석문의 거처를 먼저 밝혀내는 사람에게는 나라에서 상을 내린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형리들은 서로 다퉈가며 그의 누나인 현경련을 혹독하게 고문했습니다. 현경련은 여덟 번이나 문초를 당했습니다. 두 번의 주뢰와 곤장 300여 대를 맞았습니다. 그녀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상처 난 몸에서는 피와 고름이 흘러내렸습니다. 게다가 열병까지 걸려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현경련은 감옥에서 동생 현석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신망애(信望愛)’ 세 가지 덕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그 글에는 천주에 대한 깊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가득 담겨 있어 교우들은 이를 읽고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편지는 동생에게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현경련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녀는 감옥에 누워 조용히 순교의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다른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영광스럽게 순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