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덕(1812~1839)은 서울의 비신자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천주교를 알게 된 것은 외할머니 덕분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천주교 신자였기에 이영덕은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에게 천주교 기초 교리를 배웠습니다. 외할머니는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들에게 신자가 될 것을 간곡히 권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영덕은 아버지 몰래 어머니 조 바르바라와 동생 이인덕 마리아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천주교를 싫어했습니다. 이 때문에 가족이 겪는 고통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영덕이 출가할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비신자와 결혼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에 이영덕은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병을 핑계 삼아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자 딸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영덕은 손가락에 상처를 내어 그 피를 붓에 찍어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는 혈서를 썼습니다. 아버지는 혈서를 보고 너무 놀랐으나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일곱 해를 보냈습니다. 이영덕은 집을 나가기로 마음먹고 앵베르 주교에게 가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주교는 동의하지 않자 이영덕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교우 집에 숨어 살았습니다. 앵베르 주교는 이를 알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당시 양반 가문의 법도는 부녀자의 가출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주교는 이를 알고는 교우들에게 모녀가 거처할 집을 마련해 주라고 했습니다. 살 집이 마련되자 이영덕은 그 작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몹시 궁핍했으나 기쁘게 살았습니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영덕은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함께 살던 이 가타리나 모녀와 순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서양에서 온 성직자들이 체포된다면 자신들도 모두 자수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포졸들이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체포된 이영덕은 여섯 달 동안 혹독하게 신문과 고문을 받았습니다. 갈증과 굶주림이 이영덕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감옥에 함께 갇혔던 어머니가 열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영덕의 가슴은 찢어졌습니다.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신문을 세 차례 더 받고 곤장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결국, 이영덕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녀는 평온한 마음으로 서소문 밖 형장으로 갔고, 28세 꽃다운 나이에 참수형을 받고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