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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성직자를 보살핀 김 데레사 (축일 9월 20일)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5-06-05 13:54:29 조회수 : 47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신부의 처소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교우들은 김 데레사(1796~1840)를 적임자로 뽑았습니다. 그녀는 정성을 다해 맡은 소임을 수행했습니다. 유 신부와 교우들은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깊이 감동했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유 신부가 중국으로 떠난 후에도 김 데레사는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돌봤습니다. 당시 외국인 성직자 처소를 돌본다는 것은 목숨을 건 ‘위험한 행위’였으나 김 데레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김 데레사는 관원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때가 마흔네 살이었습니다. 


김 데레사는 순교자의 피를 이어받은 충청도 솔뫼의 독실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최초의 조선인 신부인 김대건의 당고모(아버지의 사촌 누이)입니다. 할아버지(김진후 비오)와 아버지(김종한 안드레아)도 그 모진 박해 속에서 죽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녀의 세속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세례명으로 불리는 것은 그녀의 집안이 뜨거운 신앙으로 뭉쳐진 집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일곱 살에 교우 손연욱 요셉과 결혼했습니다. 자식을 여럿 낳았으며 모든 자식에게 천주교 신앙을 심어주었습니다. 남편 손요셉은 관원에게 잡혀 충청도 해미 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남편이 순교하자 김 데레사는 매주 두 차례 단식하며 남편처럼 순교하기를 원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김 데레사는 정하상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포도청 감옥에 갇힌 김 데레사는 형리로부터 ‘천주교를 배신하라’, ‘천주교 신자들을 대라’, ‘외국인 성직자들의 거처를 대라’라는 등의 신문을 혹독하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김 데레사는 배교도 하지 않고, 교우들의 이름도 대지 않으며, 외국인 성직자들의 거처도 모른다고 하자 형벌로 태장 280대를 맞았습니다. 태장은 십여 대만 맞아도 그 고통에 기절하고 맙니다. 연약한 아녀자가 태장 280대를 맞았으니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간신히 목숨이 붙은 채로 감옥에서 여섯 달을 보냈습니다. 김 데레사는 순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본받아 그 극심한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기해박해가 끝나갈 무렵인 12월에 나라에서는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체포한 천주교인들을 하루빨리 처형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형조에서는 신속히 김 데레사에게 교수형을 선고했습니다. 교수형은 감옥에서 집행되었습니다. 형리들이 감옥으로 들어가 김 데레사를 끌어내 따로 마련한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들은 김 데레사 목에 끈을 감고 양쪽에서 세게 잡아당겼습니다. 그러곤 끈 양쪽을 말뚝에 단단히 감았습니다. 김 데레사는 ‘그렇게’ 순교했습니다. 

“순교자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합니다. 

그래서 순교자는 죽은 후 바로 천국의 영광을 누립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