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들 보아라. 황망한 시절을 당해 힘을 다하여라. …
서로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천주의 자비하신 때를
기다려라. 내 입으로 너의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하노라.”
(김대건 신부의 ‘옥중 편지’ 중에서)
조선에 가장 먼저 입국한 모방 신부는 ‘사제 양성’을 서둘렀습니다. 그래서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1821~1846)을 신학생으로 선발하고, 그들에게 라틴어, 신학, 중국어를 가르쳐 조선신학교가 있는 중국 마카오로 보냈습니다. 김대건은 8년 동안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철학, 신학, 지리학, 역사학을 공부했습니다. 김대건은 조선에 천주교를 크게 세우겠다는 뜻으로 어릴 적 이름인 ‘재복’을 ‘대건(大建)’으로 바꿨습니다. 김대건은 성경 말씀 중에 ‘겨자씨 비유’를 늘 가슴에 새겼습니다.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가 점점 심해졌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순교했습니다. 김대건의 스승 모방 신부와 부친 김제준도 순교했습니다. 그 소식은 3년이 지나 신학교에 전해졌습니다.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에게서 부제품을 받고, 천신만고 끝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김 부제는 입국 후 ‘조선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조선교회 창립부터 기해박해까지의 역사와 순교자들에 대해 라틴어로 세밀히 기록했습니다. 훗날 이 보고서는 순교자 시성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김 부제는 주교를 모셔오기 위해 작은 황포돛배를 마련했습니다. 이름을 ‘라파엘호’라 짓고 제물포를 떠났습니다. 항해 중에 폭풍우가 몰아치자 김 부제는 ‘바다의 별’ 성모 상본을 들고 기도드렸습니다. 무사히 상해에 도착해 주교를 만났고,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주교의 ‘거룩한 부름’에 김 부제는 큰 소리로 “앗숨!(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조선에 첫 번째 사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김 신부는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갖은 고난 끝에 조선에 다시 입국했습니다. 그러나 김 신부는 중국교회에 보내는 편지와 뱃길 지도를 전하러 배를 타고 서해로 나갔다가 황해도 순위도에서 체포되었습니다. 한양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회유도 있었습니다. 이유는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인문 지식이 나랏일에 도움이 될 수 있기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조정에서 김 신부의 사형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사학(邪學)의 괴수 김대건을 군문효수하라.”라는 사형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스물다섯 살의 김대건 신부는 서품받은 지 불과 13개월 만에 새남터에서 순교했습니다.
“나는 이 젊은 신부를 잃고 애통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첫 사제며 하나뿐인 신부였습니다.
그는 교우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조선교회가 그를 잃은 것은 엄청난 불행입니다.”
(페레올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