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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시대 성직자 없던 조선교회 지도자, 현석문 가롤로(축일 9월 20일)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5-07-25 09:28:21 조회수 : 14

김대건 신부는 천신만고 끝에 중국에서 조선으로 입국했습니다. 마카오에 있는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 지 여덟 해 만이었습니다. 현석문(1797~1846)은 김 신부를 평양에서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는 김대건 신부가 어렸을 적 은이 공소에서 회장으로 봉사하며 교리를 가르쳤고, 모방 신부에게 김대건을 신학생으로 추천했으며, 김대건을 비롯한 신학생들(최방제, 최양업)이 중국으로 유학갈 때 길을 안내한 인물입니다.

현석문은 서울 중인 계급의 독실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신유박해 때 순교한 현계흠의 아들이며, 기해박해 때 순교한 현경련의 동생이자, 같은 해 순교한 김 데레사의 남편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역시 기해박해 때 순교했습니다. 현석문은 앵베르 주교를 모셔오기 위해 중국을 다녀왔고,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전국을 다니며 전교 활동을 도왔습니다. 앵베르 주교가 체포되자 현석문도 포도청에 자수해 신앙을 증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조선교회를 위해 더 큰 일을 해야 한다.’라며 극구 만류했습니다. 앵베르 주교는 현석문을 회장으로 임명하여 목자 없는 조선교회를 잘 보살필 것과 자신이 집필하다 중단한 조선교회의 역사와 박해 그리고 순교자들의 행적을 이어서 기록해 후세에 남길 것을 당부했습니다. 현석문은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와 증언을 수집했고, 이를 정리해 김대건 신부에게 전했습니다. 김 신부는 그 자료를 라틴어로 번역해 파리외방전교회로 전달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조선 순교자 시성에 매우 중요한 자료인 『기해일기』입니다. 

포졸들은 조선교회의 지도자인 현석문을 체포하기 위해 전국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현석문은 잡히지 않으려고 이름을 바꾸고, 흩어진 신자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교우들에게는 음식을 제공했으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정성껏 거두어 안전한 곳으로 이장했습니다. 또한, 중국교회와 긴밀히 연락해 조선교회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알렸습니다. 그 결과 김대건 신부가 무사히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1846년에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었고 그로 인해 병오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현석문은 김 신부의 처소에 있던 교우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자신도 숨어지냈습니다. 그러나 결국 교우를 앞장세운 포졸에게 체포되었습니다. 현석문은 김대건 신부처럼 군문효수형을 받았습니다. 『헌종실록』에는 “사학죄인 현석문을 목 베어 매달아 모든 사람을 경계케 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교회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가장 용감히 나섰던 현석문은 새남터 백사장에서 거룩하게 순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