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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장 70대를 맞고 순교한 한이형 라우렌시오 (축일 9월 20일)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5-08-08 08:44:31 조회수 : 48

한이형(1799~1846)은 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열네 살에 천주교에 입교한 한이형은 오랫동안 십자가 앞에 앉아 묵상하며 죄를 통회하곤 했습니다. 주일과 의무 축일에는 십 리나 떨어진 공소까지 가서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비바람이 치는 궂은 날씨에도 절대 미사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교우와 결혼해 경기도 양지에 있는 은이 마을로 이사를 했습니다. 은이(隱里)는 ‘숨어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박해를 피해 모인 천주교 신자들이 만든 교우촌이었습니다. 한이형은 훌륭한 덕행으로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냈고 사순 시기에는 날마다 단식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보면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었습니다. 사람들은 끝없이 희생하는 한이형에게 ‘자신과 가족도 돌보라.’라고 했습니다. 이에 한이형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고,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천주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앵베르 주교는 열심한 신자인 한이형을 그곳 회장으로 임명했습니다.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병오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한이형은 가족을 피신시키고 홀로 남아 있다가 체포되었습니다. 포졸은 한이형에게 배교하고 교인들을 대라며 신문했습니다. 옷을 벗기고 기둥에 매달아 매질했습니다. 그러나 한이형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계속해서 끔찍한 고문을 당했으나 이를 용감히 참아냈습니다. 포졸은 한이형의 지독한 모습을 보고 잡혀 온 교우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진정한 천주교 신자라면 저 한이형 같아야 한다!” 한이형은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압송할 때 그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였기에 말에 태워 가려고 했으나 한이형은 거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을 오르셨기에 그 고통을 자신도 짊어지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상처 때문에 신발도 신을 수 없어 백 리가 넘는 거친 길을 맨발로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 고통은 극심했습니다. 포도청에서는 다시 한이형을 심하게 고문했습니다. 곤장을 무려 70대나 맞았습니다. 한이형은 결국 교수형을 받고 포도청에서 순교했습니다. 
『승정원일기』는 한이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승정원은 현재의 대통령비서실과 같은 일을 하는 곳으로 그곳에서 기록한 문서를 『승정원일기』라고 합니다. 

“한이형은 여러 차례 주뢰를 틀고 문초했으나 
목석(木石)과 같이 완악(頑惡)해 
배교하라는 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어 
매로 쳐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