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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의 배교자 매를 맞고 순교한 유정률 베드로(축일 9월 20일)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5-08-22 09:21:47 조회수 : 33

“그는 사교(邪敎)가 번창하는 것을 보고 괴로워했다. 또한 백성들이 차례로 사교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슬퍼했다. 그래서 관청의 삼문(三門)을 활짝 열고 백성을 모이게 해 사교를 쫓는 자들을 출두시켰다. 사교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가르친 자를 매로 쳐서 죽여 강물에 던졌다. 그리고 사교에 사용했던 책과 물품들을 모조리 불살랐다. 그는 백성들에게 충성과 효도를 가르쳐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해로운지 알게 했다. 이에 백성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모두 새사람이 되었다. 이 훌륭한 공덕을 길이 전한다.”


이글은 천주교를 탄압한 평양감사 정지용의 치적을 찬양한 글로, 평양 대동강 변에 있는 영명사(永明寺) 비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글에 ‘유정률의 순교’가 담겨 있습니다. 유정률(1837~1866)은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성격이 포악해 결혼 후에는 아내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게다가 노름까지 즐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정률은 한 친지의 권유로 천주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교리를 열심히 배웠고, 서울에서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도 받았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너무 기뻐 외쳤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발견했다!” 그 이후부터는 폭력을 삼갔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채찍으로 자기 몸에 피가 나도록 때렸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엄하게 다스려 ‘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866년 새해에 부모님과 친지들에게 세배하러 가서는 마치 이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처럼 인사를 드렸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밤, 유정률은 공소에서 교우들과 함께 예절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개들이 짖으며, 포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교우들 대부분은 도망갔습니다. 남은 사람은 유정률을 포함해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평양 감영 감옥에 갇혔습니다. 평양감사 정지용이 직접 신문했습니다. 심한 매질을 견디지 못해 유정률만 빼고 모두 배교했습니다. 감사는 잔인하게도 배교자들에게 몽둥이를 주고 유정률을 때리라고 했습니다. “포졸들은 우리에게서 몽둥이를 빼앗아 다시 우리를 내려쳤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몽둥이를 들었습니다. 들기는 했지만 내려칠 때마다 유정률의 몸에 가만히 댔습니다. 포졸들은 그것을 보고 우리를 마구 때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정률을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배교자의 증언·교황청 자료). 감사는 감옥에 있는 배교자 100명에게 유정률을 세 대씩 치라고 했습니다. 유정률은 총 300대의 매를 맞고는 ‘순교’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배교자들에 의해 대동강으로 던져졌습니다. 


“말하여라 한강아 대동강아 

순한 양 사학 죄인 얼마나 죽었더냐”

(성가 289 ‘병인 순교자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