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는 고종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이 주도했습니다. 이전의 박해에 비해 기간이 가장 길었으며(1866년~1873년) 처형된 교인도 8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조선 역사상 최대의 ‘피의 순교’였습니다. 처형 장소는 한강 변 양화진 언덕 잠두봉(蠶頭峰)인데, 목이 잘려 강물이 핏빛으로 물들어 ‘절두산(切頭山)’이란 참혹한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러시아를 서양세력 중에 가장 위협적인 나라로 보았습니다. 이에 관료 남종삼은 러시아 남하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제휴할 것을 대원군에게 제안했습니다. 조정에서도 가톨릭을 국방외교에 이용할 수 있다고 판단해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원군은 가톨릭을 희생 삼아 쇄국(鎖國)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1866년에는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졌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성직자 여러 명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베르뇌 주교를 포함한 9명이 체포되어 참수당했습니다.
남종삼(1817~1866)은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홍문관 교리를 시작으로 영월 현감, 영해 부사를 거쳐 승정원 승지(정3품)가 되었습니다. 승지는 요즘 말로 대통령 비서실 비서관으로, 차관보급(1급) 공무원입니다. 그는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었습니다. 또한, 고을의 관기(官妓)를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는 청렴한 관료였습니다. 남종삼은 최양업 신부와 가깝게 교류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앙은 더욱 성숙해졌습니다. 그 영향으로 많은 사람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남종삼을 모략하는 진정서가 임금에게 올라갔습니다. “지금 나라에는 불충한 교리를 몰래 퍼뜨리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 전직 승지 남종삼이 끼어있습니다. 그자는 나라의 은혜를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데 오륜(五倫)을 배격하고 삼강(三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즉시 의금부에 남종삼을 체포해 신문하라는 명령을 내리소서.” 이에 따라 남종삼은 체포되어 의금부(왕명을 받아 중대 죄인을 조사하는 곳)로 압송되었습니다. 여러 번 신문을 받고 혹독한 고문도 당했습니다. 무릎에 30대가 넘는 곤장을 맞았습니다.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높은 관직에 있던 그자가 온갖 마음을 기울여 사교(邪敎)를 따르고 전파했으며 오래전부터 그것에 물들어 있었다. 그는 사교를 참다운 교리라고 했다. 그의 모든 죄를 생각하면 만 번 죽어도 벌이 너무 가벼울 것이다”(사형 선고문). 남종삼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참수(斬首) 치명(致命)했습니다.
“하루살이 인생들아 허송세월 하지말고
호시절을 선용하면 후한상급 받으리라”
(남종삼이 지은 ‘천주가사’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