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운(1811~1866)은 서울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전장운에게 대세를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전장운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고 물건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1837년 박해 때 체포되어 한 달 동안 감옥에 갇혔습니다.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그만 배교하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배교한 것을 진심으로 뉘우쳤습니다. 그 죄를 용서받고 싶었지만, 조선에는 죄를 사해줄 신부가 없었습니다. 전장운은 고해성사를 줄 신부의 입국을 기다리며 참회했습니다. 마침내 김대건 신부가 입국했고, 고해성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전장운은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했기에, 베르뇌 주교는 그에게 대세를 줄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또한, 교구의 교회 서적 인쇄에 관한 일도 맡겼습니다. 그는 몇몇 교우와 목판을 만들었습니다. 나무 조각에 성경 말씀을 새겨 찍어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교회 서적을 통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교회 서적은 조선 선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가톨릭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교회 서적을 통해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어두운 밤에 ‘빛나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신자들은 피와 땀으로 만든 그 책을 소중하게 돌려가며 읽었습니다. “박해 때 만들어진 책들은 글자가 비록 검은색일지라도 순교 정신으로 바라볼 때는 ‘핏빛 글자’로 보아야 합니다”(박도식 신부).
다시 박해가 시작되었고,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포졸들은 교우들의 집을 뒤져 교회 서적을 찾아냈습니다. 교우들은 전장운에게 어서 몸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전장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천주께서 나를 천국으로 부르시면 내가 어디에 가 있던 체포될 것입니다. 나는 교우들의 생명과 같은 이 소중한 목판을 죽더라도 지키겠습니다.” 결국 포졸들이 인쇄소로 들이닥쳤습니다. 포졸이 전장운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천주교 신자냐?” “그렇소. 나는 천주교 신자요!” 포졸들은 그를 포도청으로 끌고 갔습니다. 포도청에서 사흘 동안 혹독한 신문과 형벌을 받았습니다. 발가락이 부러지고 무릎뼈와 어깨뼈가 으스러졌습니다. 의금부로 이송되어 아홉 번의 신문과 두 번의 형벌 그리고 곤장 서른두 대를 맞았습니다. 그러곤 형조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천주교 신자였던 망나니가 친분이 있던 전장운을 보고 말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자네를 죽일 수 있겠는가?” 이에 전장운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임금에게 복종하는 것이고, 나는 천주께 순종하는 것이네.” 그러고는 담담히 그의 칼 밑에 목을 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