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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순교한 최형 베드로 (축일 9월 20일)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5-09-12 09:54:18 조회수 : 35

“혹독한 곤장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쇠나 돌처럼 고집이 세서 사교(邪敎)를 절대 단념하지 않았다. 진리를 말하며 사형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했다. 이에 국법에 따라 사형에 처한다”(최형 『사형선고문』)


최형(1814~1866)은 공주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일찍 천주교에 입교했습니다. 최형에게는 형제자매가 있었습니다. 형은 1866년에 절두산에서 참수되었고, 동생은 김대건·최양업과 함께 중국 마카오로 유학 갔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최방제입니다. 누이는 평생 동정으로 살았습니다. 최형은 이처럼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스물세 살 무렵, 최형은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의 복사로 봉사했습니다. 모방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늘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이후 최형은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박해가 잠잠해지면서 풀려났습니다. 김대건 신부(당시 부제)가 마카오에서 귀국했습니다. 최형은 김 신부를 도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의 조선 입국을 위한 배(라파엘호)를 마련했습니다. 김 신부와 함께 배를 타고 상해로 가서 김 신부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러고는 배에 주교와 신부를 모시고 목숨 건 항해 끝에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최형은 김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그의 곁에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최형은 서울 남대문 밖 작은 가게에서 천주교 서적을 베끼고 묵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교우들은 그에게 예비신자와 비신자를 데리고 갔습니다. 최형은 그들에게 천주교를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최형의 신앙심을 높이 평가해 세례를 줄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또한, 천주교 서적 출판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천주교 서적을 만들어 보급하는 일은 매우 위험했습니다. 발각되면 ‘사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습니다. 그 결과 4년 동안 수천 권의 천주교 서적을 만들었습니다. 

1866년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면서 교회 서적도 발각되었습니다. 이 일로 최형은 체포되었습니다. 

재판장이 말했습니다. 

“이 흉악한 놈아! 너는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 

최형이 대답했습니다. 

“천주 앞에서는 죄를 짓지 않았소! 그러나 나라 법이 금한 일을 했으니 법대로 판결해주시오!” 

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리뼈에 매를 맞았고 머리채로 매달려 매를 맞았으며 정강이에는 서른 번이나 몽둥이질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태장 서른 대까지 맞아 다리와 어깨와 발가락뼈가 으스러졌습니다. 최형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교우들이 장사지내다 최형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탄식했습니다. 

“모든 신앙 증거자 중에서 

최형이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