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년)는 1524년 12월 17일 칙서 “Inter sollicitudines”를 통해 1525년 제9차 희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독자적이며 신학적으로 자율적인 새 칙서를 작성하기보다는, 전임 교황들의 희년 칙서를 인용·갱신하는 방식에 머물렀습니다.
1525년의 희년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습니다.
첫째,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 마련을 위해 교황 율리오 2세가 1507년에 반포한 대사 칙서(Salvator noster, Et si ex commisso)와 이를 계승한 교황 레오 10세의 1515년 대사 칙서(Sacrosanctis salvatoris), 1517년 마인츠 주교 알브레히트의 대사 훈령(Instructio Summaria), 그리고 요한 테첼 신부의 과도한 설교는 아우구스티노회 마르틴 루터 신부(1483–1546년)로 하여금 대사의 본질과 남용의 폐해를 문제 삼게 했고, 이는 ‘95개조 논제’ 발표로 이어져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둘째, 대사에 대한 루터의 부정적 견해는 희년의 신학적 정당성과 영적 감화를 약화시켰으며, 전통적 순례와 회개의 관행에 대한 설득력을 떨어뜨렸습니다. 셋째, 종교개혁의 확산과 독일의 농민전쟁, 이탈리아 패권을 둘러싼 프랑스–신성로마제국 전쟁 등으로 혼란이 가중되어, 1525년 로마 순례자는 극히 적었고 역사 기록도 거의 없습니다.
이후 트렌토 공의회 기간 중에 열린 1550년 제10차 희년은 교황 바오로 3세가 준비했으나 선종으로 실행하지 못했고, 뒤를 이은 율리오 3세(재위: 1550-1555년)가 1550년 2월 24일 칙서 “Si pastores ovium”을 반포하며 ‘성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 여파로 가톨릭을 떠난 이들의 순례는 거의 없었으며, 각국의 궁정에서 보낸 사절단을 맞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교황은 카알 5세 황제와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청원으로 전쟁 중인 군인들에게도 희년 은사를 허락했습니다.
1575년 제11차 희년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재위: 1572–1585년)가 1574년 칙서 “Dominus ac Redemptor”로 준비하였습니다. 이 희년에 그는 순례자들에게 ‘하느님의 어린양’을 상징하는 어린양의 형상이 찍힌 성물이자, 종종 목걸이 형태로 착용하거나 신심 물품으로 보존하는 “아뉴스 데이(Agnus Dei)” 메달을 축복하며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성물에는 교황의 문장과 함께 요한 복음 1장 29절의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리고 교황은 순례자들로 부터 발에 입맞춤을 받기 위해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기도 했습니다. 그 해 희년에는 모든 가장 행렬, 축제와 연회 등이 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흑사병에도 불구하고 매일 약 10만 명이 로마를 찾았으며, 성 펠릭스 칸탈리체, 성 필립보 네리, 성 가롤로 보로메오 등이 순례에 참여했습니다.
사진 - Agnus Dei Medal, 167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