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에 개봉한 영화 『김씨 표류기』에 등장하는 한 남자는 시작부터 많이 힘들어 보입니다. 그는 한강 어느 다리에서 뛰어내리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눈을 떠보니 한강에 있는 어느 섬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구조될 수 있는 그런 곳이었죠.
하지만 남자는 이 섬에서 그리 나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섬 밖의 세상은 그에게 너무나도 잔인한 공간이었으니까요. 차라리 마음 편한 이곳이 좋습니다. 배가 고프면 꽃을 따다 꿀을 빨아 먹으면 됩니다. 운이 좋으면 물고기를 잡아 구워 먹는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합니다. 섬 밖의 세상에서 즐기던 그 ‘맛’이 그립습니다. 우연히 ‘짜장라면 스프’를 발견해서 더 그런가 봅니다. 섬을 떠나기는 싫고 짜장면은 먹고 싶던 그는 결심합니다. 이 스프를 이용해 짜장면을 해 먹기로 말이죠. 이제 그에겐 목표가 생겼습니다. 바로 ‘면’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는 분주해집니다.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립니다. 밀을 심으면 참 좋았으련만 옥수수도 나쁘진 않습니다. 이런 그를 멀리서 한 여자가 지켜봅니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죠. 망원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우연히 그를 발견했는데 언제부턴가 그를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흥미로운 행동들이 짜장면을 먹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그에게 짜장면을 배달시켜 주죠. 그가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남자가 짜장면을 받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먹고 싶었을 텐데 그가 왜 저러는지 그녀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사실 남자는 흔들렸습니다. 늘 꿈꿔왔던 짜장면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짜장면을 먹으면 그동안 자신이 해온 모든 일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짜장면은 더는 ‘먹고 싶은’ 무언가가 아니었습니다. ‘이루고 싶은’ 무언가였죠. 그리고 결국 자신이 돌려보낸 짜장면보다 훨씬 맛없고 볼품없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 낸 그 짜장면 한 가닥을 입안에 넣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말죠.
저에게 영화 속 남자의 눈물은 ‘노동의 가치’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나의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그저 경이롭습니다. 나의 노력과 인내가 어떤 결실을 맺을 때의 그 뿌듯함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올해 희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의 희년은 덤으로 주어진 ‘쉼’의 한 해였죠. 그러나 이 쉼은 노동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쉼과 노동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렇기에 희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모든 노고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노고 때문에
노동은 인간에게 좋은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노동하는 인간』, 9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