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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 신학교 은인, 장주기 요셉 (축일 9월 20일)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5-10-02 09:15:45 조회수 : 42

장주기(1803~1866)는 수원 ‘느지지’(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서해 바닷물이 아산만을 통해 발안천과 고잔저수지로 ‘늦게 들어오고 늦게 빠져나가는’ 곳이어서 ‘느지지’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곳은 장주기 성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으로 현재 ‘요당리 성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장주기는 한문을 잘 아는 유식한 사람이었습니다. 형수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해지자 가족은 그를 양지 마을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에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사목하고 있었는데,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았습니다. 장주기는 기적적으로 건강해졌고 그 은총에 힘입어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모든 가족이 신자가 되었습니다. 

모방 신부가 입국했습니다. 신부는 장주기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보고 전교(傳敎) 회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장주기는 순교할 때까지 회장직을 성실하게 수행했습니다. 교우들은 입을 모아 “저런 분은 또다시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친척들은 천주교를 반대했습니다. 나라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장주기는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하려고 충청북도 제천에 있는 ‘배론’으로 이사했습니다. 그곳에 교우들이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배론(舟論)’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마치 배 밑바닥과 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입니다. 장주기가 배론에 정착한 지 10여 년이 지난 후, 메스트로 신부가 그곳으로 와 조선 최초의 신학교 ‘성요셉신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장주기는 자신의 집을 기꺼이 신학교로 봉헌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무사무욕(無私無慾)의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신학생에게 한문을 가르쳤고, 신부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신학교에서는 훌륭한 사제가 나오기를 매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장주기는 아침마다 북을 쳐 미사 시간을 알렸고 매일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그의 끝없는 희생으로 신학교는 10년 이상 잘 유지되었습니다. 

어느 날, 포졸들이 배론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신학교 교장 신부와 선교 신부가 체포되었습니다. 장주기는 제천 근처 마을로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천 관아에서 신문을 받고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재판관은 배교하라고 끊임없이 신문했지만, 장주기는 끊임없이 배교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갖은 고문이 가해진 후 임금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서양 신부들과 사교(邪敎)를 따르는 교인들을 모두 충청수영(忠淸水營)으로 보내 목을 베어 참수(斬首)하고 그 목을 높은 곳에 매달아 효수(梟首)하라.” 장주기는 그렇게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