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클레멘스 8세(재위 1592-1605년)는, 1600년이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제정한 100년 주기의 희년이며 “그리스도의 탄생 1600주년”임을 강조하며 1599년 5월 19일 칙서 “Annus Domini placabilis”로 제12차 희년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의 통풍과 관절통으로 인해 개막은 예정일보다 늦은 12월 30일에 열렸습니다. 그는 희년을 “참된 회개와 영적 기쁨의 해”로 선언하며, 1500년 희년을 함께 지냈지만 그 이후 가톨릭 교회와의 일치에서 떨어져 나간 국가들과 신자들을 ‘쓴 마음’과 ‘애통’으로 언급했습니다. 순례자 수는 매우 많아 반종교개혁 이후 교황권 회복을 보여주었습니다.
1625년 제13차 희년은 우르바노 대학의 설립자인 교황 우르바노 8세(재위 1623-1644년)가 1624년 4월 29일 칙서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Omnes gentes plaudite manibus).”를 통해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스티아 가도를 통해 흑사병이 유입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그 가도에 위치한 성 바오로 성당 대신 테베레 강 건너편 트라스테베레의 성 마리아 성당에 가서 참배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 내부의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 간의 종교전쟁이자, 유럽 강대국 간의 세력 다툼인 ‘30년 전쟁’(1618-1648년)의 한가운데 열린 이번 희년은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으나, 그 가운데서도 5월 25일에는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사벳(1271-1336년) 여왕의 시성식이 거행되었습니다.
1648년, 30년 전쟁과 80년 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조약 직후, 아직 세상이 불안한 시기에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재위 1644-1655년)는 1649년 5월 4일, 칙서 “Appropinquat dilectissimi filii”를 반포하여 1650년 제14차 희년을 열었습니다. 토스카나, 헝가리, 독일에서 온 대규모 순례단이 로마를 찾았으며, 특히 가톨릭세가 강한 바이에른에서 온 신심 깊은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요한 라이몬도 줄리아노는 160파운드(약 72.5kg) 무게의 나무 십자가를 지고 독일 뮌헨에서부터 로마까지 순례하기도 하였습니다.
1675년 제15차 희년은 교황 클레멘스 10세(재위 1670-1676년)의 1674년 4월 16일 칙서 “Ad apostolicae vocis oraculum”을 통해 선포되었습니다. 이 칙서는 단순한 희년 선포를 넘어, 당시 국제정세(오스만 전쟁, 가톨릭 군주 간 불화) 속에서 군주들에게 정치·군사·외교적 행동을 통해 가톨릭 세계의 일치를 촉구하는 성격을 띠었습니다. 로마 순례객은 약 150만 명에 달했고, ‘거룩한 문’ 개방 예식에는 20만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스웨덴의 전 여왕이었던 크리스티나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부활절 세족례에서 열두 순례자의 발을 씻기고 식탁에서 봉사하여 큰 경탄을 받았으며, 교황 역시 평복으로 네 곳의 대성당을 순례하며 같은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