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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골의 성인, 김 헨리코 도리 신부(축일 9월 20일)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5-10-16 19:24:46 조회수 : 41

김 헨리코 도리(1839~1866) 신부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날은 조선에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해 1864년 5월,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이어 6월에 조선 선교 신부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헨리코 신부는 감격해 “조선 만세! 제게 이렇게도 아름다운 전교 지역을 주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청계산 기슭에 있는 하우현 성당에 가보면 제대 맞은편 벽에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샤를르 쿠베르탕이 그린 ‘파견’이란 그림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아시아로 떠나기 전, 성당에서 파견예식을 마치고 가족 친지들과 이별하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그림 속에는 헨리코 도리 신부를 비롯해 루카 위앵 신부, 루도비코 볼리외 신부, 유스토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조선에서 순교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모토는 ‘떠나라, 그리고 돌아오지 마라.’입니다. 

헨리코 신부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마르세이유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홍콩에 도착했습니다. 다시 요동으로 가 대기하면서 조선 입국을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요동을 떠나 백령도를 거쳐 내포 지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신부는 곧바로 용인 손골리 교우촌으로 가 그곳 교우들과 함께 지내며 조선말과 풍습을 익혔습니다. 신부는 자기를 ‘김 신부’라고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조선에는 ‘김’씨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는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졸들이 손골을 덮쳤습니다. 그러곤 헨리코 신부를 체포했습니다. 신부는 서울 의금부로 압송되어 혹독한 신문과 곤장형을 받았습니다. 결국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가 귀에 화살이 꽂혔고 얼굴에 회를 쳤으며 겨드랑이에는 몽둥이가 끼워진 채 치켜올려졌습니다. 헨리코 신부는 망나니가 내려친 두 번째 칼날에 목이 떨어졌습니다. 그때 신부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었습니다. 

현재 손골 성지는 용인 광교산 골짜기에 있습니다. 성지에는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헨리코 신부 현양비가 있는데, 그 석축 위에 돌 십자가가 올려져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신부 고향 성당에서 신부 부친이 사용하던 맷돌을 재료로 해서 만든 것입니다. 십자가를 두 개 만들었는데 하나는 신부 생가에 두고 나머지 하나를 이곳으로 가져왔습니다. 


“주교님, 아름다운 땅 조선으로 가라고 나흘 전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 거룩한 땅 위에서 일하며 수많은 순교자의 피에 저의 땀을 섞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너무 좋으신 분입니다.”

(에밀 드비즈 신부 기도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