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호(1801~1866)는 충청도 임천(현 부여군 임천면) 양반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공부했습니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며 오경은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입니다. 정문호는 과거 시험에 합격해 관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고을에서 제일 높은 관직인 원님(사또)까지 지냈습니다.
천주교에 입교했습니다. 신자가 되니 벼슬에 대한 애착이 말끔히 사라져 관직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는 높은 교양과 덕행 그리고 원만한 성격으로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았습니다. 박해가 심해지자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다니며 살았습니다. 병인박해 때는 전주 지방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했습니다. 신리골에 살면서 교인과 외인 모두에게 따뜻하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예법과 규범을 쉽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박해가 호남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정문호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고을 관직에 있던 사람을 전주로 보냈습니다. 그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교인들을 기꺼이 도와주던 사람이었습니다. 이틀이 지났는데도 그에게서 아무런 기별이 없자 수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포졸들이 마을로 들이닥쳤고, 정문호는 체포되었습니다. 포졸이 말했습니다. “갑시다!” 정문호가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자는 것이오?” 포졸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천주교를 믿는 죄인이니 체포하는 것이오! 전주 감옥으로 갑시다!” 정문호는 전주로 압송되어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혹독한 고문 때문에 배교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붙잡혀온 한 교우가 고문에 시달리는 다른 교우들을 훌륭하게 격려하는 것을 보고는 배교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순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정문호는 잠시 배교의 유혹을 받았던 것에 대해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고문하는 관리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천주를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죽겠소!”
정문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사형선고문에 ‘천주교를 믿은 죄인’이라고 적혔습니다. 정문호는 감옥 밖으로 끌려나가면서 말했습니다. “오늘은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날’입니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입니다.” 형장인 전주 서문 밖 숲정이로 향하는 정문호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숲정이는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때 수많은 교우가 장렬하게 순교한 곳입니다. 정문호의 머리는 망나니의 세 번째 칼날에 떨어졌습니다. 예순다섯 살의 정문호는 그렇게 하느님 곁으로 갔습니다.
“보라 / 우리 성인들을 /
높이 화려한 천당에 / 기쁨에 넘친 얼굴”
(『가톨릭성가』 288번 ‘성인 찬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