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서(1815~1866)는 1839년에 순교한 조 안드레아의 아들로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해 최양업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봉사했습니다. 그 후에 전북 전주로 이사해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아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화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회장이 아니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만큼 교우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조화서는 교우들과 함께 평온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지방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조화서는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포졸이 묻고 조화서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천주교 신자라면 가르친 선생이 있을 것이니 그 이름을 대라.”
“나는 돌아가신 부친에게 배웠기에 선생이 없소!”
“네 가족 중에 신자를 대라.”
“나하고 아들만 신자요!”
“이 흉악한 놈아, 너 혼자 신자라고 해야지 아들까지 신자라고 하다니 너는 나쁜 놈이구나!”
아들(조윤호 요셉)은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 감옥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버지가 잡혀있는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이곳에 들어오지 말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님께서 잡히셨는데 저더러 어디로 가라고 하십니까? 저도 함께 순교하겠습니다.” 포졸은 이들 부자(父子)를 함께 체포해 전주 감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조화서는 끌려가면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네 마음이 변할까 걱정된다. 관장(官長) 앞에서 진실대로 말하라. 절대로 약해져서는 안 된다!”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도 마음을 굳게 가지셔야 합니다!” 조화서는 아들과 함께 순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부자는 전주 감영에서 또다시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관장이 말했습니다. “아들이 죽으면 너희 집안에 대가 끊긴다. 그러니 어서 배교하라!” 그러자 조화서는 “내가 이 세상에서 죽으면 나는 천국으로 가오. 그러니 죽음은 전혀 두렵지 않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관장은 형리에게 더 혹독하게 고문하라고 했습니다.
조화서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감옥에 갇힌 교우들이 배교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며 격려했습니다. 조화서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형장은 전주 서문 밖 숲정이였습니다. 조화서는 함께 형장으로 가는 교우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조화서는 형장에 도착하자 십자성호를 긋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자 망나니가 뺨을 때리며 “이 흉악한 놈, 사형장에서까지 십자성호를 긋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아들도 열흘 후에 같은 곳에서 형리의 교살(絞殺)로 순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