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노첸시오 12세(재위 1691~1700년)는 1699년 5월 18일 칙서 “영원의 임금”(Regi saeculorum)으로 1700년 제16차 희년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84세의 고령으로 병상에 있었기 때문에 대신 포르토의 주교 에마뉘엘 테오도르 드 부용 추기경이 성문을 열었습니다. 이는 교황 대신 추기경이 성문을 연 첫 사례였습니다. 교황은 같은 해 9월 27일 선종했고, 희년의 폐막은 새 교황 클레멘스 11세(재위 1700~1721년)가 집전했습니다.
제17차 희년은 이전보다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3세가 1725년 희년을 로마 지역 교회 회의(4월 15일)와 연계하여 거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성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로마 시는 여러 도시 구조 사업을 진행하였는데, 특히 이 해에 개통된 스페인 계단(Scalinata di Trinità dei Monti)은 아래쪽의 스페인 광장(Piazza di Spagna)과 위쪽 언덕에 위치한 트리니타 데이 몬티(Trinità dei Monti) 성당을 연결하며 국제 순례자들의 동선을 크게 개선하였습니다.
제18차 희년은 교황 베네딕토 14세(재위 1740~1758년)가 1750년에 거행하였습니다. 교황은 이 거룩한 축제를 위하여 1749년 5월 5일 칙서 “주님에게서 멀어진 나그네들”(Peregrinantes a Domino)을 반포하였습니다. 이 해 희년을 가장 인상 깊게 만든 인물은 프란치스코회 포르토 마우리치오의 성 레오나르도(1676~1751년)였습니다. 그는 콜로세움에 ‘14처의 십자가의 길(Via Crucis)’을 설치하고, 순례자들에게 고해와 참회를 권하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1처에서 14처까지의 형태는 이때 비로소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제19차 희년(1775년)을 앞두고 교회는 큰 격변을 겪었습니다. 당시 가톨릭 강대국들의 강력한 요구에,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1773년 예수회를 해산시켰던 것입니다. 이어 1774년 4월 30일, 교황은 칙서 “우리 구원의 창조자”(Salutis nostrae Auctor)를 통해 제19차 희년을 선포하였지만, 그해 9월 22일 선종하였습니다. 134일이라는 긴 콘클라베 끝에 1775년 2월 15일 선출된 비오 6세 교황은 즉위 다음날 곧바로 성문을 열었으나, 계몽주의 확산과 정치적 불안 속에 순례자 수는 저조한 수준이었습니다. 이후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 프랑스군에 의해 로마가 점령되었고, 비오 6세는 1800년 희년을 선포하지도 못한 채, 1799년 8월 29일 망명지 발랑스(Valence)에서 선종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