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서(1821~1866)는 대대로 천주교를 믿는 충청도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전라도 전주 교우촌인 성지동(숲정이)에 정착했습니다. 이명서는 온순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으며, 모범적인 가정생활과 열심한 신앙생활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슴 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지방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전라도에서는 교우들이 많이 사는 성지동과 대성동이 가장 먼저 피해를 입었습니다. 12월, 포졸들이 성지동에 들이닥쳤습니다. 포졸들이 이명서 집에 들어가 물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냐?” 이 말에 이명서는 겁에 질려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명서와 각별하게 지내던 교우 조화서(최양업 신부의 복사 겸 마부 일을 했던 성인)는 그 말을 듣고는 이명서 곁에 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자네는 나와 같은 마을에서 사는데 포졸들이 자네 말을 믿을 것 같은가? 배교하면 절대 안되네!” 그 말을 들은 이명서는 곰곰이 생각하고는 포졸에게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한다며 “나는 천주교 신자요!”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포졸이 그에게 주기도문과 성모송을 외워보라고 하자 이명서는 기도문을 줄줄이 외웠습니다. 그러고는 몸도 많이 아프고 먹여 살릴 식구들도 있으니, 목숨은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포졸이 그를 불쌍히 여겨 “오늘 밤에 도망가라. 도망가지 않으면 다시 잡힐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풀어주었습니다. 이명서는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대로 집에 남아있었습니다. 조화서를 비롯해 많은 교우가 체포되었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다른 포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러자 이명서가 산으로 피하려고 보따리를 짊어지고 급히 가는 것을 포졸이 보고 소리쳤습니다. “저 늙은이가 어제는 병자였는데 오늘은 멀쩡하구나!” 결국, 이명서는 체포되어 다른 교우들과 함께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명서가 가장 먼저 신문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중병에 걸렸으므로 배교시키기 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손발과 머리를 묶어 고정하고는 등을 곤장으로 수없이 내려쳤습니다. 손발이 뒤틀리며 관절이 모두 빠졌습니다. 이명서는 혹독한 고문을 잘 이겨냈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여러 번 죽더라도 천주를 결코 배반할 수는 없소!”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이명서는 감옥에 갇힌 교우들을 격려하며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교우들은 격려에 힘을 얻어 아침저녁으로 기도문을 큰소리로 외웠습니다.
교우들과 함께 처형되는 날이었습니다. 이명서가 교우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순교하면 모두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오늘은 천국에 가는 정말 ‘기쁜 날’입니다!” 이명서는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첫 번째 칼을 받고는 순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