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 프랑스군의 로마 점령으로 베네치아에서 콘클라베가 열렸고, 새로 선출된 교황 비오 7세는 로마로 귀환하였으나 희년을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1825년 교황 레오 12세는 제20차 희년을 선포하였으나, 전쟁의 상처와 사회적 불안으로 순례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1850년에도 희년은 열리지 못했는데, 이탈리아 독립 혁명으로 인해 가에타로 피신했던 교황 비오 9세가 로마로 귀환한 후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히려 1854년에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를 선포하며 특별 희년을, 1867년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순교 1800주년 기념 특별 희년을 거행했습니다. 1875년의 희년에도 교황 비오 9세는 이탈리아 정부의 통제로 성문 개폐식을 거행할 수 없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 레오 13세는 1900년, 제22차 희년을 성대히 거행하며 성 베드로 대성당을 전기조명으로 밝혔고, 이탈리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순례자를 맞이하도록 했습니다. 1925년 희년 기간에 비오 11세는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의 시성식(5월 17일)과 한국 순교자 79위의 시복식(7월 5일)을 거행했습니다. 또한, 비오 11세는 1933년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19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희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희년 칙서 「Quod nuper」(1933년 1월 6일)에서 처음으로 로마 외에 팔레스티나 성지 순례를 권장하였습니다. 이로써 교황은 십자군 이후 닫혀 있던 이 성지(Terra Sancta)로 희년의 범위를 확장하였습니다. 그리고 1950년 희년에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 승천 교의를 선포하였습니다. 이어서 교황 바오로 6세는 1967년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 1900주년을 기념하며 특별 희년을 선포하였고, 1975년 ‘화해의 해’로 불린 제25차 희년을 선포하였는데, 개·폐막식이 세계 최초로 생중계되었습니다. 이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3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1950주년 특별 희년을 선포하였습니다. 특히 이때의 청년 모임은 오늘날의 ‘세계 청년의 날’(WYD) 제도로 이어졌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제26차 대희년을 거행하고, 2003년 성 바오로 사도의 선교 1950주년 기념 특별 희년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08년 사도 바오로 탄생 2000주년과 201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 및 「가톨릭교회 교리서」 반포 20주년 기념을 위한 특별 희년을 거행했습니다. 이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특별 희년으로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였고, 2025년 제27차 희년을 맞이하여 칙서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Spes non confundit)를 선포하며 희년의 개막식을 열었으나, 폐막식은 그의 선종으로 레오 14세 교황에게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두 교황의 손을 거쳐 이어진 이 희년은, 교회의 희망이 세대를 넘어 계속된다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